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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법 하나 때문에 미국은 제 기름도 못 쓴다

ph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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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에서 든 이상한 생각

기름을 넣다가 문득 든 생각이었다. 한국은 원유가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인데, 왜 정유사 실적 발표는 매번 경제 뉴스 첫 줄을 차지할까. 반도체나 자동차라면 이해가 간다. 우리가 원료를 캐서 파는 것도 아닌 산업이 어떻게 국가 수출 3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한동안 궁금증만 쌓아뒀다.

답은 의외로 단순한 데 있었다. 한국은 원유를 사서 되파는 게 아니라, 원유를 사서 완전히 다른 물건으로 바꿔서 판다. 이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하루 285만 배럴 중 절반 넘게 다시 나간다

한국은 하루 평균 285만 배럴의 원유를 수입한다. 1배럴이 159리터니 어마어마한 양인데, 이 중 국내에서 실제로 소비되는 비율은 40%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60%는 경유·휘발유·항공유·나프타 같은 제품으로 정제된 뒤 그대로 다시 배에 실려 해외로 나간다.

이게 왜 놀라운가 하면, 보통 ‘석유 의존도가 높다’는 말은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한국의 경우는 결이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전 세계 석유 소비 상위 10개국 중 산유국이 아닌 나라는 일본·한국·독일 셋뿐이고, 그중에서도 한국은 GDP 대비 석유 의존도가 일본의 두 배, 독일의 네 배에 이른다. 이 수치만 보면 에너지를 과소비하는 나라처럼 보이지만, 실은 원유를 받아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바꿔 전 세계에 뿌리는 가공무역 기지에 가깝다.

왜 하필 중동의 ‘질 나쁜’ 기름을 쓰는가

원유는 성분에 따라 값이 갈린다. 가볍고 불순물이 적은 경질유(Light Oil)는 비싸고, 끈적하고 유황이 많은 중질유(Heavy Oil)는 싸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70%가 중동산이고, 그중 99%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난다. 그런데 한국 정유사들이 굳이 이 저가 중질유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미국산 경질유보다 배럴당 4달러가량 저렴한 데다, 한국 정유 설비 자체가 애초에 중질유를 고도로 분해·정제하도록 설계돼 있다. 설비를 경질유용으로 바꾸려면 최소 반 년에서 1년 넘게 공장을 세워야 한다. 이 정도 전환 비용이면 어지간해서는 손대지 않는다. 결국 ‘싼 원료를 쓸 수밖에 없는 설비’가 ‘싼 원료를 가장 잘 다루는 기술’로 이어졌고, 이게 다른 나라가 쉽게 따라오지 못하는 진입장벽이 됐다. 처음엔 이게 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질 낮은 원료를 쓴다는 게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력의 근거라니.

미국이 자기 기름을 놔두고 한국산을 사는 이유

여기서부터가 진짜 재미있는 대목이다. 미국은 셰일 혁명 이후 하루 1,300만 배럴을 생산하는 세계 1위 산유국이다. 그런데도 매일 660만 배럴의 원유와 정유제품을 해외에서 수입한다. 자국에서 기름이 넘쳐나는 나라가 왜 수입을 하나 싶은데,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 내 정유 공장이 50년 가까이 신규 건설 없이 낡아버렸다는 것. 다른 하나는 1920년에 만들어진 존스법(Jones Act)이다. 미국 내 항만 간 운송은 미국에서 건조되고 미국인이 소유·운항하는 배로만 해야 한다는 이 법 때문에, 텍사스에서 캐낸 원유를 캘리포니아로 옮기는 해상 운임이 국제 시세보다 훨씬 비싸진다. 그러니 미국 서부에서는 자국산 원유를 정제하느니 태평양 건너 한국산 석유제품을 사 오는 쪽이 더 싸게 먹힌다. 100년 전 만든 법 하나가 지금 태평양 무역 항로를 좌우하고 있는 셈이다.

이 구조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분야가 항공유다. 한국은 전 세계 항공유 시장의 약 30%를 점유한 세계 1위 공급국이고, 미국이 해외에서 수입하는 항공유의 70%가 한국산이다. 만약 한국이 항공유 수출을 하루아침에 멈춘다면 전 세계 상업 항공기 세 대 중 한 대는 뜰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정도면 독점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A commercial airplane being refueled on an airport tarmac
A commercial airplane being refueled on an airport tarmac

일본은 자체 정유 생산능력이 부족해 한국산 제품을 수입하고 비상시 공급 협정까지 맺어 놓은 상태고, 호주와 뉴질랜드는 아예 자국 정유 공장을 접고 한국 수입에 상당 부분을 의존한다. 한국이 정유 강국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이 주변국들의 선택이 보여준다.

숫자로 보면 이렇다

말로 풀면 흩어지는 수치들을, 한눈에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비축까지 남에게 빌려줄 정도의 여유

정유 능력만이 아니다. 한국의 석유제품 생산능력은 미국·중국·러시아·인도에 이어 세계 5위이고, 울산과 여수 등지의 9개 비축기지에 약 1억 4,600만 배럴, 208일치 분량의 전략 비축유를 쌓아두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저장 시설 일부를 중동 산유국에 임대해준다는 점이다. 비상시엔 한국이 우선 사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자원 하나 안 나는 나라가 산유국의 기름을 대신 보관해주고 있다니, 처음 들었을 땐 순서가 바뀐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 모든 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구조는 아니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정부가 정유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밀어붙였고, 그 결과 SK이노베이션·GS칼텍스·S-Oil·HD현대오일뱅크 4사가 세계 최상위권 생산 효율을 확보했다. 오늘날 정유제품은 반도체, 자동차 다음으로 한국의 3대 수출 품목이다.

싱가포르나 로테르담과는 뭐가 다른가

정유 허브라고 하면 싱가포르나 네덜란드 로테르담도 떠오른다. 둘 다 원유가 안 나면서 정제·재수출로 먹고사는 곳이라는 점은 한국과 비슷하다. 다만 규모와 설비 성격에서 결이 다르다. 싱가포르는 말라카 해협이라는 물류 요충지를 낀 중계·저장 거점 성격이 강하고, 로테르담은 유럽 내수 시장을 겨냥한 정제 기지에 가깝다. 반면 한국은 저품질 원료를 고품질 완제품으로 바꾸는 ‘고도화 분해’ 설비 비중이 유독 높다. 단순히 원유를 받아 정제하는 수준을 넘어, 등급이 낮은 원료를 등급 높은 상품으로 뒤바꾸는 데 특화됐다는 뜻이다. 이 고도화 설비에 들어간 투자 규모 자체가 후발 주자들이 단기간에 따라잡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정제 마진이라는 개념도 짚어볼 만하다. 정유사가 원유를 사서 제품으로 만들어 파는 과정에서 남기는 차익을 뜻하는데, 저가 중질유를 들여와 고가 제품으로 뽑아내는 구조에서는 이 마진 폭이 상대적으로 크게 벌어진다. 원료값은 싸게 주고, 완제품은 국제 시세에 맞춰 파는 셈이니까. 다만 정제 마진은 국제 유가 흐름과 설비 가동률에 따라 분기마다 출렁이는 값이라, 정유사 실적이 왜 그렇게 들쭉날쭉한지도 이 지점에서 설명이 된다.

좁은 해협 하나에 걸린 목줄

물론 이 구조에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한국이 수입하는 중동 원유의 99%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는 사실은, 뒤집어 말하면 이 좁은 해협 하나가 막히는 순간 원료 공급선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중동 분쟁 국면에서 원유 시장가가 단기간에 59% 가까이 뛴 일이 이 리스크를 그대로 보여줬다. 정부가 비축유 방출과 가격 상한 유도로 소비자가를 1,800원 선에서 붙잡아뒀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완충일 뿐 근본적인 경로 리스크를 없앤 건 아니다.

대체 경로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미국산 경질유를 늘리거나 다른 지역 원유 비중을 높이는 방법이 이론적으로는 있다. 하지만 앞서 짚었듯 설비 전환에만 반 년 이상이 걸리고, 미국산은 운송 기간과 비용 자체가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결국 단기적으로는 대체가 거의 불가능한 구조라서, 호르무즈 리스크는 ‘가끔 터지는 이벤트’가 아니라 이 산업이 안고 가야 하는 상시 변수에 가깝다.

울산과 여수가 흔들리면 지역 경제가 흔들린다

이 산업의 무게는 수출 통계 밖에서도 확인된다. 울산과 여수는 정유·석유화학 단지를 중심으로 지역 경제 상당 부분이 돌아가는 도시다. 정유사 한 곳의 가동률이 떨어지거나 대규모 설비 투자가 미뤄지면, 그 여파가 협력업체·물류·서비스업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국가 전체로 보면 정유업이 3대 수출 품목이라는 통계 하나로 요약되지만, 지역 단위로 내려가면 이건 산업이 아니라 생활권 자체를 떠받치는 기반에 가깝다. 정유 산업의 경쟁력을 이야기할 때 수출액만 보고 지역 경제에 걸린 무게를 빼먹으면, 그림의 절반만 보는 셈이 된다.

이 구조, 얼마나 오래 갈까

최근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로 국제 유가가 출렁일 때마다 국내 기름값이 시장가만큼 오르지 않은 것도 이 인프라와 정책적 완충 장치가 같이 작동한 결과였을 것이다. 다만 이 구조가 영원할 거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전기차 전환 속도, 미국 정유 설비 재투자 여부, 존스법 개정 논의 같은 변수들이 계속 걸려 있어서다. 지금으로선 ‘당분간은 쉽게 안 흔들릴 구조’라고 말하는 게 정직한 선일 것 같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지점은, 이 경쟁력이 국가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1970년대 두 차례 석유 파동을 겪고 나서야 정유업을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설비 투자를 밀어붙인 건 정부였다. 지금 와서 ‘한국은 원래 정유를 잘하는 나라’라고 말하면 이 과정이 지워진다. 자원이 없는 조건을 불리하다고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저가 원료를 다루는 기술로 승부를 본 선택이 지금의 항공유 30% 점유율로 이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결과보다 그 과정의 방향 설정이 더 눈에 들어온다.


참고자료
  1.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박현도 교수 중동 에너지 분석
  2. 한국석유공사(KNOC) 원유 도입 통계
  3. 대한석유협회(KPA) 정유산업 현황 자료
  4. 산업통상자원부 석유·에너지 수급 통계
  5.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Petroleum & Other Liquids 데이터
  6. IEA Oil Market Report
  7. 한국무역협회(KITA) 수출입 통계
  8. SK이노베이션·GS칼텍스·S-Oil·HD현대오일뱅크 사업보고서
  9. S-Oil 사우디 아람코 지분 투자 관련 공시자료
  10. 미국 존스법(Merchant Marine Act of 1920) 관련 정책 분석
  11. 한국가스공사·석유공사 비축기지 운영 현황
  12.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항공유 수급 자료
  13.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
  14. 한국은행 산업별 수출 비중 통계
  15. OPEC 및 EIA 세계 석유생산능력 순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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