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한창이던 밤, 습도계 숫자가 44%까지 떨어진 걸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이불을 다시 덮었다. 그런데 자다가 등이 축축해서 깼다. 분명 습도는 낮은데 왜 이렇게 덥지. 제습기 앞에 손을 대보니 미지근한 정도가 아니라 후끈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고장인가 싶어 검색창에 “제습기 뜨거운 바람"을 쳤는데, 결과는 좀 의외였다. 고장이 아니라 원래 그렇다는 거였다.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에어컨은 찬바람이 나오는데 제습기는 왜 안 그럴까. 그리고 물통에 고인 저 맑은 물, 마셔도 되는 걸까.
이 기계, 정확히 뭘 하고 있는 걸까
제습기라고 하면 흔히 “습기를 없애는 기계"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정확한 표현도 아니다. 제습기가 실제로 하는 일은 공기 중에 흩어져 있던 수분을 한곳으로 모으는 것뿐이다. 없애는 게 아니라, 옮기는 것.
원리는 냉장고나 에어컨과 다르지 않다. 냉매가 압축과 팽창을 오가면서 온도를 낮췄다 올렸다 하는 냉동 사이클, 그 안에서 차갑게 식은 금속판(증발기) 표면에 공기 중 수증기가 물방울로 맺힌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캔 음료 표면에 물기가 맺히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그 물이 아래로 흘러 물통에 고이면, 공기는 그만큼 건조해진 채로 다시 방 안에 풀린다.
여기까지는 에어컨의 실내기가 하는 일과 다를 게 없다더라.
그런데 그 열은 다 어디로 갈까
제습기에는 열을 내보낼 문이 없다. 에어컨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이거다.
에어컨은 증발기가 공기에서 빼앗은 열을 냉매가 배관을 타고 바깥까지 실어 나른 뒤, 실외기에서 대기 중으로 뱉어낸다. 그래서 에어컨을 켠 방은 온도도 습도도 함께 내려간다. 열이 빠져나갈 문이 있어서다.
반면 제습기는 증발기와 응축기가 한 몸통 안에 들어앉아 있다. 냉매가 회수한 열은 갈 곳 없이 같은 기계 안에서 다시 실내 공기로 돌아간다. 습도는 떨어지는데 온도는 그대로거나 오히려 살짝 오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실제로 실내 온도가 1~2℃가량 높아진다는 설명도 있었다.
숫자로 보면 더 또렷해진다. 가정용 제습기 한 대의 소비전력은 대개 시간당 300~400Wh 안팎. 압축기를 돌리는 데 쓰인 이 전력은,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물리 법칙에 따라 전부 열로 바뀌어 방 안에 남는다. 초소형 전기히터를 계속 켜놓은 것과 사실상 같은 발열량이다. 다른 게 있다면 그 열이 “습기를 없애는 부산물"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어서, 방이 더워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가 어렵다는 정도.
흥미로운 건, 같은 냉방·제습 원리를 쓰는 에어컨조차 습도만 낮추고 싶을 땐 제습 모드 손을 들어준다는 점이다. 삼성전자 에어솔루션 연구팀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같은 온도 조건에서 제습 모드의 습도 제거 효율이 냉방 모드보다 약 2.7배 높았다. 불쾌지수로 환산하면 냉방 모드 73에서 제습 모드 70으로,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50%에서 10%로 줄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냉방 모드는 설정한 온도에 맞추는 게 목적이라, 목표 온도에 도달하면 압축기 출력을 낮춰 유지 모드로 넘어간다. 습도 제거는 그 과정에서 딸려오는 부수 효과에 가깝다. 반면 제습 모드는 온도보다 습도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목표 습도에 닿을 때까지 압축기와 풍량을 계속 조절하면서 수분을 붙잡는 데 집중한다. 같은 부품, 같은 냉매 사이클을 쓰면서도 무엇을 기준으로 움직이는지가 다르면 결과가 이렇게 갈린다.
냉풍 겸용은 왜 안 만들까
정확히 말하면, 안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드는 순간 다른 기계가 된다.
실외기를 붙이고 응축기를 밖으로 빼내는 순간 그건 이미 제습기가 아니라 에어컨이다. 시중에 파는 이동식 에어컨이 그 형태다. 배기 호스로 창밖에 열을 버리는 대신 냉방과 제습을 동시에 얻는다. 다만 창틈으로 호스를 내야 하고, 음압 때문에 바깥의 더운 공기가 틈으로 다시 들어오거나 호스 표면 자체가 실내로 복사열을 내뿜는 문제가 있어서, 효율은 벽걸이형 에어컨보다 확실히 떨어진다.
반대로 제습기가 지금의 이동성과 저렴한 소비전력을 유지하면서 실외기까지 붙이려면, 회수한 열을 버릴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열역학 문제이지 기술력 문제가 아니다. 밀폐된 방 안에서 에너지 보존 법칙을 피해 갈 방법은 없다는 뜻이다.
옷장이나 신발장에 넣어두는 제습제는 아예 다른 길을 택한 물건이다. 압축기도 냉매도 없이, 염화칼슘이 스스로 습기를 흡수해 알갱이가 녹아 물이 된다. 열을 옮길 필요조차 없으니 발열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처리 용량이 작아서 방 하나를 통째로 말리기엔 역부족이다.
넓은 공간을 빠르게 말리려면 열을 실내에 되돌려주는 대가를 치르는 압축기식을, 좁은 공간을 천천히 말리는 데는 발열 없는 제습제를 쓰는 식으로 용도가 갈리는 셈이다.
물통 속 맑은 물, 정체가 뭘까
이 물은 사실 단 한 번의 정수 과정도 거치지 않은 물이다. 그런데도 겉보기엔 정수기 물보다 맑다. 미네랄이 거의 없어 증류수에 가까운 성질을 띠기 때문이다. 수돗물처럼 물때가 끼지도 않는다.
하지만 맑다는 것과 깨끗하다는 건 다른 얘기다. 이 물이 지나온 경로를 되짚어보면 답이 나온다. 실내 공기 → 필터 → 알루미늄·구리 재질의 냉각 코일 → 물통. 정수 과정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위키피디아의 제습기 항목을 찾아보면, 열교환기에서 나온 구리·알루미늄 같은 미량 금속이 물에 섞일 수 있고, 증류수와 달리 이 물은 끓이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 곰팡이 포자나 세균이 정체된 물속에 그대로 쌓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한 가전 청소 관련 기사에서는, 제습기 내부 오염은 눈에 잘 안 띄어 위험을 체감하기 어렵지만 실제로는 공기청정기보다 세균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전문가 코멘트를 다루기도 했다. 검출됐다고 해서 곧바로 위험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물통 상태나 청소 주기에 따라 편차가 클 텐데, 다만 정수 처리를 거치지 않은 물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나도 예전에 이 물이 아까워서 화분에 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관상용 식물이라 큰 문제는 없었겠지만, 식용 작물이었다면 다시 생각해봤을 것 같다. 청소나 변기 물 보충처럼 사람이 직접 마시거나 접촉하지 않는 용도로는 무리 없이 써도, 마시거나 다리미에 넣는 용도로는 권장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물은 그대로 마신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도 우리 집 제습기와 똑같은 원리로 물을 만든다. 지구에서 약 400km 떨어진 그곳에서, 승무원이 내쉬는 날숨과 흘리는 땀 속 수분을 응축해서 모으는 것까지는 다를 게 없다.
다른 건 그다음이다. ISS의 물 재활용 시스템(Water Processor Assembly)은 응축한 물을 곧바로 저장하지 않는다. 여과와 증류를 거치고, 이어 촉매 산화 처리 단계를 통과시킨다. 소변까지 재활용하는 미국 측 승무원의 경우, 별도의 소변 처리 어셈블리(Urine Processor Assembly)를 한 단계 더 거쳐야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진공 증류 방식으로 정화율을 93%에서 98%까지 끌어올렸다던데, 소독 방식도 양측이 다르다. 미국 쪽은 요오드로, 러시아 쪽은 항균 작용이 있는 은이온으로 소독한다.
NASA 마셜 우주항공센터의 물시스템 관리자는 한 인터뷰에서, 소변을 재활용했다는 심리적 거부감만 걷어내면 병에 든 생수 맛과 다르지 않다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이 얘기를 처음 접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던 게 사실이다. 근데 곱씹어보면 그렇게 이상한 반응도 아니다 싶다. 응축이라는 첫 단계는 우리 집 제습기와 똑같은데, 그 뒤에 여러 단계의 정수 공정이 더 붙어야 비로소 안전한 식수가 되는 셈이니까.
이 정도로 공을 들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ISS는 물을 새로 가져올 방법이 마땅치 않다. 비상용으로 비축해둔 물조차 2천 리터 남짓이 미국 구역과 러시아 구역에 나뉘어 있을 뿐이다. 물 1리터를 지구 궤도까지 쏘아 올리는 비용을 생각하면, 있는 물을 한 방울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쪽이 합리적이다. 우리 집 제습기는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환경에 놓여 있으니, 굳이 응축수를 몇 단계씩 정수해서 마실 이유가 없다. 물이 얼마나 귀한지가, 정수 단계의 개수를 결정하는 셈이다.
이 물,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까
세 가지 궁금증을 다시 늘어놓아 보면, 답은 한 자리를 가리킨다. 제습기가 하는 일은 무언가를 없애는 게 아니라 옮기는 것. 습기를 공기에서 물통으로 옮기고, 열을 냉매 안에서 순환시킬 뿐 밖으로 버리지 못하고, 오염물질을 공기 중 부유 상태에서 물속 침전 상태로 옮겨놓을 뿐이다.
범위를 조금만 넓혀보면 이 이야기는 제습기 하나에 그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냉장고는 음식물의 부패를 없애는 게 아니라 늦출 뿐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열은 뒷면 방열판을 통해 고스란히 부엌으로 되돌아간다. 에어컨 실외기가 뿜어내는 열기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옆 건물 벽을 타고 도심 전체의 열섬 현상에 한 방울씩 보태진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이게 실제로 얼마나 큰 영향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방향성 자체는 비슷해 보인다.
요즘은 물통을 비울 때 한 번씩 들여다본다. 이 물이 어디서 왔고, 이 열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쓰는 것과 모르고 쓰는 것 사이엔, 아마 좀 다른 게 있는 것 같다.
참고자료
- 한경 - '제습기'와 '에어컨 제습'의 차이…올바르게 사용하려면 (hankyung.com)
- 나무위키 - 제습기 항목, 압축기식 구조와 실외기 유무 설명 (namu.wiki)
- 위키트리 - 에어컨 제습 기능 vs 제습기 사용, 전기요금 비교 (wikitree.co.kr)
- 제습기 구매가이드 - 작동원리·제습성능·사용편의 3가지 기준 (nosearch.com)
- 아하(a-ha) - 실외기 없는 에어컨은 어떤 원리인가요 (a-ha.io)
- Wikipedia - Dehumidifier 항목, 발열 원리와 응축수 위생 관련 서술 (en.wikipedia.org)
- Deye 블로그 - 제습기에서 나온 물은 마셔도 안전할까요 (deye.com)
- 위키트리 - 세균 득시글거리는 제습기, 위생 관리법 (wikitree.co.kr)
- 삼성 뉴스룸 - 개발자들이 알려주는 에어컨 에너지 효율 극대화 꿀팁 (news.samsung.com)
- 우먼타임스 - 삼성전자 개발자가 알려주는 여름 에어컨 절전 꿀팁 (womentimes.co.kr)
- 코리사이언스 - 이동식 에어컨 정말 시원할까, 단일호스·이중호스 비교 (koriscience.com)
- 제습기·이동식 에어컨 원리 정리 (nosearch.com)
- 경향신문 - 미국 우주인들의 식수는 정수 처리한 소변 (khan.co.kr)
- SBS 뉴스 - 우주정거장에선 어떤 물 마실까, 소변 재활용 식수 사용 (news.sbs.co.kr)
- 파퓰러사이언스 코리아 - 땀과 소변도 마셔야 한다, 우주비행사의 생존 기술 (popsci.co.kr)
- ZDNet Korea - NASA, 우주인 소변→식수 시스템 업그레이드 (zdnet.co.kr)
- NASA - Space Station Regenerative ECLSS Flow Diagram (nasa.g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