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31일, 미국 메릴랜드주 캠프데이비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각료회의 테이블 위에 메모장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앞이었다.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할 일: 일본 엔화 50억~100억 달러 매수.”
이 메모가 로이터 카메라에 잡히기 전까지, 세계 어느 금융시장 참가자도 이 문장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이 엔화를 산다는 것은, 달러를 판다는 뜻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통화의 발행국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약세에 시달려온 통화를 떠받치기 위해 자국 돈을 팔았다.
28년 만의 일이었다.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엔화를 사는 쪽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해에도 미국은 무너지는 아시아 경제를 지켜보다 못해 개입했다.
이번에도 표면적 이유는 같았다. 엔저가 위험 수위를 넘었고, 누군가는 막아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이 개입의 실제 수혜자를 추적하면, 엔화보다 먼저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미국 국채다.
일본은 미국 국채 보유국 1위다. 2026년 5월 말 기준 1조 1,431억 달러어치를 들고 있다. 2위 영국(9,486억 달러), 3위 중국(6,593억 달러)을 크게 웃돈다.
엔화가 무너질수록 일본은 자국 통화를 방어하기 위해 보유한 미국 국채를 팔아야 하는 압박을 받는다.
팔아야 할 액수가 커지면, 미국 국채시장 자체가 흔들린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어온 자산의 가격이, 그 자산을 가장 많이 쥔 나라의 통화 위기 때문에 출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다시 물어야 한다.
미국은 정말 엔화를 구하려 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국채를 구하려 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의 사건을 넘어, 국제금융 질서 전체가 서 있는 지반을 다시 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지반 위에는, 한국의 원화도 함께 서 있다.
숫자로 감을 잡아보자. 미국 재무부가 하루 만에 사들이겠다고 적어둔 50억~100억 달러는, 한국의 하루 평균 외환 거래대금과 비슷한 규모다.
한 나라의 재무장관이 각료회의 도중 메모지에 끄적인 숫자가, 다른 나라 하나의 외환시장 전체가 하루 동안 소화하는 물량과 맞먹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메모가 실행에 옮겨진 지 사흘, 지구 반대편 서울의 환율 전광판 숫자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40년 만의 엔저, 그리고 예정된 것 같았던 반전
이야기는 2026년 여름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엔화는 2022년 이후 구조적 약세 국면에 있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가파르게 올리는 동안, 일본은행은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했다.
두 나라의 금리 차이는 벌어질 대로 벌어졌고, 그 차이만큼 돈은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는 쪽으로 흘렀다.
2026년 상반기, 이 흐름은 정점을 찍었다.
중동에서 벌어진 이란과의 군사적 긴장이 유가를 밀어올렸고,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 경제는 이중으로 압박받았다.
3월 한때 달러당 159엔까지 밀렸던 환율은, 7월 30일 뉴욕 장 초반 163.7엔을 넘어섰다. 1980년대 이후 최저 수준이었다.
같은 시점 일본 통화당국의 발언 수위도 높아지고 있었다.
최고 외환 당국자 미무라 아츠시는 “정부가 필요하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반복해 경고했다.
시장은 이 발언을 개입 전조로 읽었지만, 개입 그 자체만으로는 추세를 꺾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학습한 뒤였다.
4월 한 달간 일본 정부가 단독으로 쏟아부은 개입 자금은 11조 7,349억 엔. 4월 30일 하루에만 6조 2,787억 엔이 들어갔다. 엔화 매수 개입 기준 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런데도 환율은 개입 직후 155엔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160엔 근처로 돌아왔다.
혼자서는 안 됐다. 그래서 7월 31일, 미국이 합류했다.
여기서 잠깐,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이번이 일본의 첫 개입도, 첫 좌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2022년 9월 22일, 일본은 24년 만에 처음으로 엔저를 막기 위한 외환 개입에 나섰다.
당시에도 시장은 잠시 진정되는 듯했지만, 그해 10월 20일 환율은 결국 달러당 150엔을 넘어섰다.
2024년 7월에는 도쿄가 또 한 번 개입에 나섰고, 그 결과로 그어진 160엔이라는 선이 이후 시장에서 하나의 심리적 방어선으로 자리 잡았다.
이 사건들을 나란히 놓아 보면, 일본의 개입사는 매번 같은 패턴을 반복해왔다는 것이 드러난다.
급격한 엔저 → 단독 개입 → 일시적 반등 → 추세 복귀.
2026년 여름의 차이는 단 하나, 이번에는 일본 혼자가 아니라 미국이 함께 나섰다는 점이었다.
교도통신과 NHK 보도에 따르면,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재무상은 미국과 일본이 7월 31일 엔화 매수 공동 개입을 실시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조치는 전년도 9월 발표된 미·일 재무장관 공동성명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이번 개입은 돌발적 결정이 아니라, 이미 예정된 협정의 실행이었다.
효과는 즉각적이고 강렬했다.
뉴욕 장 초반 163.7엔을 웃돌던 달러·엔 환율은 31일 157.3엔대로 급락했다.
국제금융센터 집계로는 이날 하루 엔화가 달러 대비 2.43% 절상됐고, 다음 날인 8월 3일 도쿄 아시아 시장에서도 추가로 0.36% 올랐다.
유로·엔 환율 역시 개입 이전 187엔대에서 181엔대로 내려가며, 엔화는 달러뿐 아니라 다른 주요 통화에 대해서도 일제히 강세를 보였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단순히 지켜본 게 아니라, 직접 손을 움직였다는 점이다.
뉴욕 연은은 달러·엔 환율에 대한 레이트 체크(주요 은행에 호가를 확인하는 시장 개입의 사전 절차)를 실시한 데 이어, 유로화를 팔고 엔화를 사는 거래까지 집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시각 한국 외환당국도 시장안정화 조치에 나선 정황이 포착되면서, 시장에서는 이를 사실상 한·미·일 3국의 공조 개입으로 받아들였다.
방어선의 이름: FIMA 레포
공동 개입 사실이 확인된 지 사흘 뒤, 더 구체적인 그림이 드러났다.
8월 3일, 가타야마 재무상은 일본이 이번 개입 과정에서 미 연준의 FIMA 레포 기구를 활용했다고 공식 확인했다.
**FIMA는 *****‘Foreign and International Monetary Authorities’***의 약자다.
이 제도는 2020년 3월, 코로나19 팬데믹이 몰고 온 글로벌 달러 유동성 경색에 대응하기 위해 연준이 만든 장치다.
작동 원리는 단순하다. 외국 중앙은행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연준에 담보로 맡기면, 연준이 그 대가로 달러를 빌려준다.
일종의 환매조건부채권, 즉 레포(Repo) 거래다.
이 제도가 왜 이번 사태의 핵심으로 떠올랐는가. 답은 일본이 놓인 딜레마에 있다.
엔화를 방어하려면 일본은 시장에서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야 한다. 그런데 일본이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성 달러는 한정돼 있다.
가장 손쉬운 조달 방법은 보유한 미국 국채를 시장에 직접 매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방법이 부작용을 낳는다는 데 있다.
1조 1천억 달러가 넘는 국채를 쥔 최대 보유국이 매도에 나서면, 국채 가격은 떨어지고 금리는 튄다. 미국 정부의 조달 비용이 오르고, 미국 금융시장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FIMA 레포는 이 딜레마를 우회하는 길이었다.
국채를 팔지 않고도, 그 국채를 담보로 맡긴 채 달러를 빌려 쓸 수 있다.
일본 입장에서는 자산을 처분하지 않고 유동성을 확보하는 셈이고,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 국채시장이 대량 매도 충격을 피하는 셈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조치가 일본의 미국 국채 매도를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여기서 이 사태를 관통하는 첫 번째 반전이 드러난다.
표면적으로 이 개입은* “미국이 일본을 도운” *사건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그 도움의 실행 방식을 뜯어보면, 미국이 지킨 것은 엔화의 가치가 아니라 자국 국채시장의 안정이었다.
일본을 돕는 것이, 곧 미국 자신을 돕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개입의 배경을 ‘제2의 트러스 쇼크’를 막기 위한 선제적 조치로 풀이하기도 한다.
2022년 영국의 트러스 정부가 무리한 감세안을 발표했을 때, 국채 금리가 폭등하며 연기금들이 마진콜에 몰려 국채를 투매하는 악순환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구조가 비슷하다.
엔화 약세와 국채 금리 급등이 동시에 발생하면, 일본 생명보험사와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들이 보유한 해외 자산─그중 상당수가 미국 국채─의 투자 매력이 흔들리고, 동시에 국내 국채 금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연금펀드의 자국 내 투자 비중을 늘리는 과정에서 보유 중인 미국 국채를 매도할 유인이 커진다.
이 매도가 이미 2007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 중이던 미국 30년물 국채 금리에 추가 충격을 준다면, 그 파장은 일본을 넘어 미국 금융시스템 전체로 번질 수 있었다.
이 반전을 좀 더 구체적인 장면으로 옮겨보면 이렇다.
일본 재무성이 실제로 국채를 대량 매도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매도는 그 자체로 미국 국채 가격을 끌어내리고 금리를 밀어올린다. 미국 국채 금리가 오르면, 그 금리를 기준으로 삼는 3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금리도 함께 오른다.
미국의 한 가정이 매달 갚는 주택 대출 이자가 늘어나고, 신규 주택 구매를 고민하던 사람들은 계약을 미룬다.
기업들이 회사채를 발행할 때 지불해야 하는 금리도 오르고, 설비 투자 계획은 재검토에 들어간다.
도쿄의 재무성 사무실에서 결정된 국채 매도 한 건이, 몇 주 뒤 미국 어느 도시의 주택 계약서 위에서 다른 숫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미국이 이 연쇄를 사전에 끊으려 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의 개입을 설명하는 또 다른 동기가 있다.
바로 한국과 일본이 미국에 약속한 대규모 투자다.
두 나라 모두 트럼프 행정부와의 무역 협상 과정에서 대미 투자 확대를 약속한 상태였다.
그런데 원화와 엔화 가치가 무질서하게 흔들리면, 이 투자 계획 자체가 흔들릴 위험이 있었다.
통화가치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자금을 해외로 내보내는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고, 반대로 불안정한 시점에 투자를 강행하면 외환시장의 불안을 오히려 심화시킬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대미 투자를 차질 없이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두 나라 통화가치를 일정 범위 안에서 관리해줄 유인이 있었던 셈이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한 연구원은 미국의 참여 동기를 정치적 고려, 자국 국채시장 방어, 그리고 대일 무역적자 축소를 노린 엔화 안정이라는 세 갈래로 정리하기도 했다.
베선트 재무장관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현재 600억 달러 규모로 묶여 있는 FIMA 레포 한도를 확대하거나 아예 폐지하는 방안이 합리적이라고 언급하며, 제도 확대 가능성을 시사했다.
위기 상황에서 임시로 꺼내 쓰는 안전판이었던 도구가, 상시적인 개입 수단으로 격상될 조짐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 조치에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따라붙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8월 6일 이번 개입이 시장에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IMA 레포를 통해 연준이 일본에 달러를 빌려주는 과정 자체가, 양적완화(QE)와 유사하게 연준의 대차대조표를 확대하고 수십억 달러의 유동성을 경제에 추가로 공급하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긴축이 필요한 시점에, 환율 방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돈을 더 풀고 있는 모순이 발생했다. WSJ는 이를 **“긴축과 정반대 방향”**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실제 집행 규모를 보면 이 우려는 아직 현실화하지 않았다.
8월 6일 기준 FIMA 레포 잔액은 전주와 마찬가지로 ‘제로’였다. 6월 셋째 주부터 8주 연속 잔액이 없었다.
연준이 밝힌 올해 최대 사용 규모도 2월 첫째·둘째 주에 각각 30억 달러, 1억 500만 달러에 그쳤을 뿐이다.
시장 참가자들은 일본의 실탄이 이 창구에 예치돼 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공식 통계로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제도의 존재와 확대 가능성 자체가 시장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실제 집행 규모보다 훨씬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1조 달러를 빌려준 쪽이 을이 되는 순간
은행 대출 창구에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100만 원을 빌리면 내가 은행에 매달리지만, 100억 원을 빌리면 은행이 나에게 매달린다는 말이다.
빚의 규모가 어느 선을 넘는 순간, 채권자와 채무자의 위치가 뒤집힌다.
돈을 빌려준 쪽이 오히려 그 돈을 돌려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처지가 되고, 빌린 쪽은 상환을 미루거나 조건을 재협상할 힘을 얻는다.
금융권에서는 이를 두고 “너무 커서 망하게 둘 수 없다"는 말로 부르기도 하고, 부실채권 실무자들은 좀 더 노골적으로 “큰 빚은 채무자의 무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구도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다시 보면, 지금까지 익숙했던 그림과는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
표면의 서사는 이렇다.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고 기축통화 발행국이다.
일본은 그 통화를 빌려 쓰고, 그 나라 국채를 사 모으는 입장이다.
채권자는 일본이고, 채무자는 미국인데도, 힘의 우위는 미국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달러는 세계가 원하는 자산이고, 일본은 그 안전자산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유량이 1조 1,431억 달러를 넘어서는 순간, 이 관계의 무게중심이 바뀐다.
일본이 이 채권을 대량으로 팔겠다고 마음먹으면, 미국 국채 가격은 흔들리고 금리는 치솟는다.
미국 정부의 조달 비용, 나아가 미국 가계의 주택담보대출 금리, 기업의 회사채 발행 비용까지 줄줄이 영향을 받는다.
일본은 이제 단순한 ‘채권 보유국’이 아니라, 미국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빚을 진 쪽이 미국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무게를 갖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이번 개입을 다르게 읽어야 하는 이유다.
국이 엔화 방어에 나선 것은 일본에 대한 선의가 아니라, 자신이 진 빚의 채권자가 위기에 빠졌을 때 발생할 후폭풍을 관리하기 위한 자기방어였다.
은행이 부실 조짐을 보이는 대기업에 추가 대출을 내주는 장면과 본질적으로 같다.
그 대기업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대기업이 무너지면 은행 자신의 대차대조표가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사실이 다시 배열된다.
FIMA 레포가 국채를 팔지 않고도 달러를 조달하게 해주는 우회로였다는 점은, 채권자(일본)가 담보를 쥔 채로 매도 압력을 피해가도록 채무자(미국)가 판을 깔아준 구조였다는 뜻이 된다.
베선트 장관이 FIMA 레포 한도 확대를 언급한 것도, 앞으로 이런 상황이 반복될 것을 미국 스스로 예상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
권력은 언제나 자원을 가진 쪽에 있다고 배운다.
그러나 어떤 자원은, 너무 많이 쌓이면 그 자원을 쥔 사람을 인질로 만든다.
미국과 일본은 지난 수십 년간 이 상호의존을 서로의 이익을 위해 유지해왔다.
미국은 값싸게 국채를 팔아 재정을 운용했고, 일본은 안전자산을 축적하며 자국 통화 약세를 통해 수출 경쟁력을 유지했다.
그 균형이 팽팽하게 당겨진 지금, 어느 한쪽이 손을 놓으면 둘 다 다친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이 상호 인질극에서 흥미로운 점은, 겉보기 힘의 크기와 실제 협상력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국내총생산으로 보면 미국은 일본의 다섯 배가 넘는 경제 규모를 가졌다.
군사력, 기축통화 발행권, 국제기구에서의 영향력 모두 미국이 압도적이다.
그런데도 미국 재무장관이 각료회의 도중 급하게 메모를 남기고, 자국 통화를 팔아 상대국 통화를 사들이는 이례적 조치에 나선 이유는, 이 힘의 격차가 국채라는 한 가지 특정한 채널 안에서는 정반대로 뒤집히기 때문이다.
전체 체급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쪽이, 특정 접점 하나 때문에 상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 국제금융의 상호의존은 이렇게 국지적으로 힘의 방향을 뒤집는 지점들을 곳곳에 숨겨두고 있다.
원화는 왜 함께 움직였나
이 모든 이야기가 태평양 건너 남의 나라 재무부 메모에서 시작된 일처럼 느껴진다면, 서울 명동의 환전소 앞으로 가보자.
8월 초, 그 거리의 환율 전광판 숫자는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8월 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5.8원 오른 1,429.8원에 거래를 마쳤다.
그런데 이 흐름은 곧 방향을 바꿨다.
8월 5일에는 8.0원 내린 1,424.5원, 8월 7일에는 장중 한때 1,407.4원까지 떨어지며 종가 1,411원을 기록했다.
원·달러 환율은 7월 한 달 동안에만 종가 기준 125.4원 하락했다.
이는 월간 낙폭으로 2009년 3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그리고 8월 19일에는 종가 1,397.7원, 장중 한때 1,388.5원까지 밀리며 11개월 만에 1,300원대에 재진입했다.
8월 21일에는 장중 1,380.3원까지 하락했다.
이 숫자들의 흐름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다.
엔화가 미·일 공조 개입으로 강세를 회복하자, 달러 강세 전반이 약화됐고, 그 여파가 원화를 포함한 아시아 통화 전반의 동반 강세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달러 약세와 엔화 급락세 완화가 원화를 포함한 아시아 통화에 우호적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물론 원화 강세를 엔화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같은 시기 한국의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62.8% 증가한 988억 9천만 달러를 기록했고, 무역수지는 303억 2천만 달러 흑자를 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달러 매도 물량이 시장에 꾸준히 유입됐고, 중공업체들의 선물환 매도도 환율 하락 압력을 더했다.
국내 수급이라는 독자적인 힘도 분명히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힘─엔화발 외부 충격과 반도체발 내부 수급─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겹쳤다.
그 결과가 원·엔 환율이라는 또 하나의 지표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8월 13일 기준 원·엔 환율(100엔당)은 887.84원으로, 2024년 7월 23일(884.1원)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내려왔다.
상반기 950원 안팎에서 움직이던 원·엔 환율이 한 달여 만에 60원 넘게 급락한 것이다.
엔화가 강세를 보이면 원·엔 환율이 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원화가 그보다 더 강하게 오르면서 원·엔 환율은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여기서 독자가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이유가 분명해진다.
원·엔 환율의 하락은 당장 일본 여행 경비, 일본산 수입품 가격, 국내 기업의 대일 수출 경쟁력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원화 강세는 해외 유학이나 여행에는 유리하지만, 수출로 먹고사는 기업의 채산성에는 부담이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이 보유한 해외 자산의 원화 환산 가치도 이 환율에 따라 매일 출렁인다.
태평양 건너 재무장관의 메모 한 장이, 결국 한국인의 월급과 노후자금이 걸린 숫자를 흔드는 회로 안에 있다는 뜻이다.
이 흐름을 조금 더 구체적인 장면으로 옮겨보자.
도쿄로 여름휴가를 준비하던 한 서울 직장인이 있다고 하자.
7월 초 100엔에 950원 안팎이던 환율을 기준으로 숙소와 예산을 짰다면, 8월 중순 그의 여행 경비는 실질적으로 6퍼센트 넘게 줄어드는 셈이 된다.
반대로 도쿄에 부품을 수출하는 부산의 한 중소 제조업체 대표에게는 같은 숫자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엔화로 받는 대금을 원화로 환전할 때마다, 같은 물량을 팔고도 손에 쥐는 원화는 줄어든다.
하나의 환율 숫자가, 누군가에게는 여행 가방을 하나 더 채울 여유를 주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음 분기 채용 계획을 접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기금운용본부의 한 사람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의 어느 운용역은 지난 4월, 자신이 담당하는 해외 주식 포트폴리오의 원화 환산 수익률표를 열었다가 이상한 숫자를 마주했다.
실제 투자한 종목들의 달러 기준 수익률은 나쁘지 않았는데, 원화로 환산한 최종 수익률은 그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환율 상승, 즉 원화 약세가 만들어낸 착시였다.
달러로 벌지 않아도, 원화 가치가 떨어지기만 하면 장부상 수익률이 올라가는 구조였다.
이 현상이 반복되자 논란이 불거졌다.
시장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이 성과급을 많이 받기 위해 환율 상승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투자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제기됐다.
실제로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논란 자체가, 700조 원이 넘는 기금을 굴리는 기관의 셈법이 원화 환율 한 줄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준다.
국민연금은 오랫동안 ‘환오픈’ 전략을 기본으로 삼아왔다.
2018년 이후 해외투자 자산에 대해 환헤지를 거의 하지 않았다. 환차손을 방어하는 것보다, 헤지 없이 해외 주식에 그대로 노출되는 편이 장기 수익률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6년 4월,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를 위협하는 국면에서 기금운용위원회는 방향을 틀었다.
전략적 환헤지 비율을 기존 10%에서 15%로 올리기로 의결한 것이다.
여기에 기금운용본부가 상황에 따라 조정하는 전술적 헤지(±5%포인트)를 더하면, 최대 20%까지 환위험을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이 결정에는 숫자 이상의 의미가 있다.
환헤지 비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국민연금이 앞으로 받을 달러를 지금 가격에 미리 팔아두는 거래를 늘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시장에 달러 매도 물량이 늘어나 환율 상승 압력을 낮추는 효과가 생긴다.
세계 3대 연기금 중 하나로 꼽히는 기관이, 이제 수익 추구자의 역할을 넘어 환율 방어의 ‘완충 장치’로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성주 국민연금 이사장은 외신 인터뷰에서 “1,400원대 초반이 적정한 균형 수준"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연기금 수장이 특정 환율 수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문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김대종 세종대 교수는 환헤지 확대가 단기적으로 원화 약세 압력을 완충하는 보조적 역할은 할 수 있지만, 환율은 근본적으로 금리 격차 같은 거시 변수가 결정하는 만큼 구조적 흐름 자체를 바꾸기는 어렵다고 짚었다.
시장 소화 능력의 문제도 남았다.
국민연금의 환헤지 확대로 발생하는 물량은 44조에서 88조 원 규모로 추산됐다.
국내 외환시장이 이 물량을 한꺼번에 받아내기엔 한계가 있었고, 결국 국민연금은 외화채 직접 발행이라는 우회로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환헤지를 넘어 달러를 직접 조달하는 단계로, 대응의 강도가 한 단계 더 올라간 셈이다.
이 모든 조치의 기저에는 하나의 두려움이 있다.
원화가 통제 범위를 벗어나 급변동할 경우, 그 충격이 2천만 명 넘는 국민의 노후자금 운용 성과로 고스란히 전이된다는 두려움이다.
태평양 저편의 재무장관 메모와 서울 여의도 기금운용본부의 위기인식지수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문장을 쓰고 있다.
불이 붙을 뻔했던 자리
이 사태를 지켜보는 시장 참가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어가 있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다.
캐리 트레이드는 단순한 원리로 작동한다.
금리가 낮은 통화로 돈을 빌려, 금리가 높거나 수익률이 좋은 자산에 투자한다.
일본은 오랫동안 초저금리를 유지해온 나라였기 때문에,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공짜에 가까운 자금 조달처’였다.
엔화를 빌려 미국 주식을 사고, 신흥국 채권을 사고, 한국이나 대만 증시에 넣는 돈의 상당 부분이 이런 경로를 거쳤다.
이 구조가 무너지는 순간은 정해져 있다.
엔화가 갑자기 강세로 돌아서거나, 일본의 금리가 오르면,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 부담이 커진다.
투자자들은 서둘러 포지션을 정리하고 엔화를 되사기 시작한다.
이 되사기 행렬 자체가 엔화를 더 강세로 만들고, 강세는 다시 더 많은 청산을 부른다.
눈덩이가 굴러가듯 가속이 붙는 되먹임 구조다.
2024년 8월, 이 시나리오가 실제로 벌어졌다.
미국의 고용지표 부진이 경기침체 우려를 키운 시점에 일본은행이 금리를 인상하자, 엔 캐리 포지션이 한꺼번에 청산됐다.
그 여파로 코스피와 코스닥은 각각 8.8%, 11.3% 폭락했다.
당시 도이체방크발로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가 20조 달러에 달한다는 추정이 퍼지며 공포를 부풀렸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럼에도 시장이 받은 충격은 실재했다.
2025년 12월에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30년 이내 최고치인 0.75%로 올렸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코스피를 비롯한 아시아 증시는 별다른 동요 없이 지나갔다. 차이는 포지션에 있었다.
그해 3월 기준 비상업용 엔화 순포지션은 1조 7천억 엔 규모의 순매수, 즉 시장이 이미 금리 인상과 엔화 강세를 예견하고 선제적으로 엔화를 사둔 상태였다.
불이 붙으려 해도 붙일 도화선이 없었던 셈이다.
2026년 여름, 도화선이 다시 놓였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투자자별 포지션 보고서에 따르면, 7월 28일 기준 엔화에 대한 투기적 순포지션은 마이너스 16만 3,400계약으로 집계됐다.
매도(숏)가 매수(롱)를 압도하는 구도다.
이는 2024년 8월 ‘블랙먼데이’로 불린 아시아 증시 급락 직전과 닮은 쏠림이다.
게다가 2026년 초에는 10년물을 위시한 일본 국채금리가 폭등하며, 2024년 때와 달리 실제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위험이 임박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여기에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이 겹쳤다.
일본은행은 6월 정책금리를 31년 만의 최고 수준인 1%까지 끌어올렸다.
한국금융연구원은 8월 22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미·일 외환시장 공조 개입과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이 동시에 맞물릴 경우 글로벌 자금 흐름이 급변하며 국내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엔캐리 트레이드가 미·일 금리차, 엔화 약세, 낮은 변동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 위에서 유지돼 왔는데, 2026년 여름 이 세 조건이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24년 8월의 그 하루를 시간 단위로 복기해보면, 이 되먹임 구조가 얼마나 짧은 시간에 완성되는지 알 수 있다.
미국 고용지표가 예상보다 부진하게 발표된 직후, 엔 캐리 포지션을 쥐고 있던 헤지펀드들은 몇 시간 안에 청산 주문을 쏟아냈다.
그 매물이 엔화를 밀어올렸고, 오른 엔화는 다른 포지션의 손실을 확대해 추가 청산을 불렀다.
이 연쇄가 하루 만에 코스피를 8.8퍼센트, 코스닥을 11.3퍼센트 끌어내렸다.
서울 여의도의 트레이딩 데스크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그날은 도쿄에서 결정된 것도 아니고 워싱턴에서 결정된 것도 아닌 숫자 하나가, 자신들이 아침에 짜둔 포트폴리오를 오후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은 하루로 기억된다.
그렇다고 곧바로 위기가 온다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없다.
국제금융센터는 앞선 보고서에서, 급격한 엔화 강세가 청산 유인을 자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캐리 트레이드의 조달과 운용 구조 자체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고 짚었다.
일본은행의 통화정책 정상화가 청산 가능성을 일부 키운 것은 맞지만, 본격적인 청산의 시발점으로 보기엔 시기상조라는 평가였다.
역설적인 안정 요인도 있다.
시장이 이미 추가 개입 가능성을 의식하게 된 만큼, 단기적으로 엔화를 공격적으로 매도하기는 오히려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개입이 반복될수록 그 자체가 다음 베팅을 주저하게 만드는 견제 장치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 견제가 무한정 유효하지는 않다.
8월 14일, 미·일 공동 개입에도 엔화는 다시 약세로 돌아섰다. 원화 강세까지 겹치며 원·엔 환율은 100엔당 887.8원, 2년여 만의 최저 수준까지 내려왔다.
외환당국과 시장에서는 미·일의 추가 개입 여력이 제한적인 데다, 일본의 확장재정과 낮은 성장 잠재력을 고려하면 엔화가 추세적으로 반등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개입은 방향을 잠시 꺾을 수는 있어도, 구조 자체를 되돌리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문제를 막는 나라들
이 국면에서 세 나라─미국, 일본, 한국─가 취한 대응은 서로 다른 도구를 썼지만, 겨냥한 것은 결국 같은 문제였다.
통제되지 않는 변동성이었다.
미국은 개입 자체와 그 프레이밍을 도구로 썼다.
재무부의 직접 매수, FIMA 레포를 통한 우회 유동성 공급, 그리고 이 모든 조치를 “동맹국을 돕는다"는 언어로 포장하는 것까지. 다만 연준 안에서는 이 조치가 인플레이션 억제라는 본연의 정책 목표와 충돌한다는 내부 긴장이 감지된다.
유동성을 더 풀면서 동시에 물가를 잡아야 하는 모순된 임무를 떠안은 셈이다.
일본은 전통적인 직접 개입과 금리 정상화를 병행했다.
4월 한 달에만 11조 엔이 넘는 자금을 단독으로 투입했고, 6월에는 정책금리를 31년 만의 최고 수준으로 올렸다.
그러나 이 두 조치는 서로 다른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개
입은 단기 변동성을 억누르려는 응급처방이었고, 금리 인상은 인플레이션 관리라는 별개의 과제였다.
두 조치가 우연히 같은 방향─엔화 강세─을 가리키면서, 오히려 그 둘이 겹칠 때 발생할 수 있는 급격한 청산 위험을 스스로 키우는 역설에 놓였다.
한국의 대응은 세 나라 중 가장 다층적이었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동결하며 정책 여력을 아꼈다.
국민연금은 환헤지 비율을 10%에서 15%로 올리고, 위기 발단(60점)과 위기 심각(80점) 두 단계로 나눈 ‘위기인식지수’를 새로 도입해 단계별 대응 체계를 갖췄다.
금융감독원은 해외 투자에 나선 개인 투자자, 이른바 서학개미의 환위험 관리를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여기에 한국은행과 국민연금 사이의 650억 달러 규모 외환스와프 계약이 연말까지 연장되며, 정책당국과 연기금이 함께 방어선을 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세 나라의 온도 차도 뚜렷했다.
미국과 일본은 ‘개입’이라는 명시적이고 가시적인 카드를 썼다.
시장에 직접 신호를 주는 방식이다.
한국은 그보다 조용한 카드를 썼다.
연기금의 헤지 비율 조정, 위기 지수 도입처럼, 시장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기보다 제도의 완충력을 키우는 쪽에 무게를 뒀다.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은 자국 통화의 가치를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발행국이지만, 한국은 원화 환율을 결정하는 힘의 상당 부분을 외부 변수─엔화, 달러, 미·일 금리차─에 의존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쓸 수 있는 카드의 종류 자체가 다르다.
이 비대칭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수치가 있다.
일본이 4월 한 달 단독 개입에 쏟아부은 돈은 11조 7,349억 엔, 원화로 환산하면 100조 원을 훌쩍 넘는 규모다.
한국 정부의 1년 예산 중 일부 부처 예산과 맞먹는 돈이 단 한 달,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시장에 투입됐다는 뜻이다.
반면 한국의 대응은 국민연금이라는 기존 제도의 손잡이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새 돈을 찍어 시장에 던지는 대신, 이미 쌓여 있는 700조 원 넘는 기금의 운용 방식을 조정해 시장에 간접적인 신호를 보냈다.
총알의 크기가 아니라 총알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달랐던 셈이다.
이런 비대칭 속에서도 세 나라의 정책 담당자들이 공통으로 마주한 딜레마가 있다.
환율 방어를 위한 조치가, 각자 나라의 다른 정책 목표와 충돌한다는 딜레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하는데 개입이 유동성을 늘렸고, 일본은 재정건전성을 걱정해야 하는데 금리 인상이 국채 이자 부담을 늘렸고, 한국은 연기금 수익률을 극대화해야 하는데 환헤지 확대가 그 수익률을 갉아먹을 잠재적 요인이 됐다.
환율이라는 하나의 숫자를 지키기 위해, 세 나라 모두 각자 다른 곳에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28년 전에도 있었던 장면
이 개입을 두고 “역사적 사건"이라는 표현이 여러 시장 분석가들의 입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 장면은 사실 처음이 아니다. 28년 전에도, 거의 같은 모양의 위기가 있었다.
1997년 6월, 달러당 110엔대였던 엔화 가치는 이듬해 146엔까지 미끄러졌다.
당시 일본은 금융위기 한복판에 있었다. 이 엔저를 막은 것도 미국의 도움이었다.
1998년 6월 17일, 미국과 일본은 공동으로 엔화를 사들이며 시장에 개입했다.
그 배경에는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일본 총리와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사이의 합의가 있었다.
두 정상은 “엔화 안정이 아시아와 세계 경제에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했고, 그 대가로 일본은 자국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에 신속히 대응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옛 장면과 2026년 여름의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반복되는 패턴이 보인다.
일본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엔저 국면에서, 미국이 손을 내밀고, 그 대가로 일본은 미국이 원하는 다른 무언가─당시엔 부실채권 정리, 이번엔 대미 투자 이행과 안보 동맹 강화─를 내놓는다.
겉으로는 우호와 협력의 언어로 포장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교환의 논리가 있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번 개입을 두고 뼈아픈 진단을 내놓았다.
***“엔화 하락을 자력으로 막지 못하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통화 패전에 더 큰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재무성의 외환정책 실무 책임자가 같은 공동 개입을 “미·일 통화동맹의 완성형"이라고 자평했던 것과 정반대의 진단이었다.
같은 사건을 두고 한쪽은 협력의 성취로, 다른 쪽은 자립의 실패로 읽은 셈이다.
니혼게이자이는 1998년과 2026년의 공동개입이 모두 대등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쪽과 도움을 베푸는 쪽의 위치가, 28년의 시차를 두고도 그대로였다는 뜻이다.
2011년의 사례는 정반대 방향에서 이 비대칭을 보여준다.
그해 3월 동일본대지진 직후, 엔화는 오히려 급등했다.
일본 기업들이 해외 자산을 팔고 복구 자금을 위해 엔화를 본국으로 송환할 것이라는 예상이 투기적 매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때는 G7이 공조해 엔화를 파는 개입에 나섰다. 방향은 정반대였지만, 이 역시 일본 혼자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요국들이 나서 개입한 사례였다.
2026년의 공동개입은 이 2011년 이후 15년 만의 G7 공조이자, 엔화를 사들이는 방향으로는 1998년 이후 28년 만의 사건이었다.
이 세 순간─1998년, 2011년, 2026년─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일본은 매번 자국 통화가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흔들릴 때마다, 결국 외부의 개입에 의존해왔다.
그 외부가 미국 단독이든 G7 전체든, 형태는 달라도 구조는 같았다.
자국 통화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더 큰 힘의 결단에 기대야 하는 처지가 세 번의 위기 동안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골드만삭스는 이번 개입 직후 “엔화 약세의 근본 원인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글로벌 여건이나 정책 변화가 없다면 시간이 지나며 약세 압력이 다시 커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1998년 공동개입 당시에도 146엔대였던 환율은 두 달 만에 147엔으로 되돌아간 전례가 있다. 개입은 매번 통증을 잠시 멈추는 진통제였을 뿐, 병의 원인을 치료한 적은 없었다.
시장이 정한다는 말의 뒷면
경제 교과서는 환율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유변동환율제 아래에서 통화 가치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결정한다. 정부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고, 개입은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이번 사태는 이 문장을 다시 읽게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깊고 가장 유동적이라는 외환시장─하루 거래대금이 수조 달러에 이르는 시장─이, 재무장관의 메모 한 장과 통화당국 간의 며칠짜리 조율만으로 방향을 바꿨다.
7월 30일 163.7엔이던 환율이 사흘 만에 157엔대로 내려왔다.
시장 참가자 수백만 명의 개별 판단이 누적된 결과라기보다, 몇몇 정책 결정권자의 의도가 시장 전체를 눌러버린 장면에 가까웠다.
여기서 소급해야 할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시장이 환율을 결정한다"고 믿어온 것은, 사실 “평상시에는 시장이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만, 임계점을 넘으면 소수의 국가가 개입해 방향을 되돌린다"는 조건부 진실이 아니었을까.
자유변동환율제는 개입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개입의 문턱이 충분히 높게 설정된 상태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 문턱을 낮출지 높일지, 언제 넘을지를 결정하는 힘은 소수의 손에 있다.
이 힘의 비대칭은 국채 보유 구조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일본이 쥔 1조 달러가 넘는 미국 국채는 일본에게 어느 정도의 발언력을 준다.
그러나 이 발언력은 일본이 원할 때 마음껏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국채를 팔아 자국 통화를 지키려는 순간, 그 매도 자체가 미국 금융시장을 흔들고, 흔들린 미국 금융시장은 다시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 경제에 충격을 되돌려준다.
상호의존은 서로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뜻이지, 대등한 협상력을 보장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인질극 안에서, 판을 먼저 짜고 규칙을 정하는 쪽은 언제나 기축통화 발행국이었다.
한국은 이 판 안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 원화는 기축통화가 아니다.
국채를 대량으로 팔아 상대국 시장을 흔들 힘도 없다. 그러나 완전한 방관자도 아니다.
반도체 수출이 만들어내는 달러 유입, 국민연금이 쥔 수백조 원의 해외 자산, 외환보유고의 규모─이 모든 것이 한국을 이 회로 안의 한 참여자로 만든다.
다만 그 참여의 방식은 미국이나 일본과는 다르다. 한국은 판을 짜는 쪽이 아니라, 판이 흔들릴 때마다 자신의 완충 장치를 조정해가며 버티는 쪽이다.
메모 한 장의 무게
캠프데이비드의 그 메모로 돌아가 보자.
“일본 엔화 50억~100억 달러 매수.” 카메라에 우연히 잡힌 몇 개의 단어였다.
그러나 그 몇 단어가 사흘 만에 세계 외환시장의 방향을 돌렸고, 그 파장은 도쿄를 거쳐 서울의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실까지, 명동 환전소의 전광판까지 이어졌다.
이 사태를 처음 마주했을 때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대개 안도감이었다.
엔저가 멈췄다, 누군가 나섰다, 시장이 진정됐다.
그러나 그 안도감의 이면을 한 겹만 걷어보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미국이 지킨 것은 엔화가 아니라 자신의 국채시장이었고, 일본이 확보한 것은 안정이 아니라 시간이었고, 한국이 취한 조치는 통제가 아니라 완충이었다.
누구도 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다음 충격이 올 때까지의 유예를 벌었을 뿐이다.
닛케이가 이번 개입을 “통화 패전"이라 부른 것과, 일본 재무성 실무자가 같은 사건을 “통화동맹의 완성형"이라 부른 것─이 두 개의 표현은 사실 같은 사실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이다.
도움을 받는 쪽은 그 도움을 자립의 실패로도, 협력의 성과로도 부를 수 있다. 어느 쪽으로 부르든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일본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통화가치를 미국의 결단에 기대어 지탱했다.
그리고 이 구조 안에서, 이름을 붙이는 언어의 선택권조차 완전히 일본의 몫은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개입을 “일본과의 우호 관계” 때문이라고 설명했을 때, 그 설명의 프레임을 정하는 목소리 역시 미국 쪽에서 먼저 나왔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다음번에 비슷한 메모가 등장할 때, 그래서 엔화든 원화든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릴 때,
한국은 그 순간을 그저 버텨내는 참여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이 회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조금이라도 더 단단하게 만들어 둘 것인가.
반도체 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 국민연금이 쌓아온 해외 자산, 그리고 위기 때마다 새로 고안해내는 제도적 장치들은 이미 그 답의 재료가 되고 있다.
다만 그 재료를 어떤 그림으로 조립할지는, 아직 누구도 완전히 확정하지 않았다.
참고 문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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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경제, “‘1998년 이후 처음’…美·日, 엔화 방어 나선 이유[주末머니]” (2026.8.8)
- 국민일보, “대지진도 금융위기도 없는데…미국이 ‘엔화 구하기’ 나선 이유” (2026.8.3)
- 헤럴드경제, “WSJ ‘美 엔화 개입, 뜻밖의 역효과’…시장에 달러 더 풀었다” (2026.8.7)
- 서울경제, “엔화 방어에 美까지 동원한 日…닛케이 ‘통화 패전’” (2026.8.12)
- 아주경제, “[미·일 환율 공조 후폭풍] 양국 공동 개입에 엔화 반등…원·달러는 어디로” (2026.8.4)
- 파이낸셜뉴스, “美·日 공동개입에 엔화값 급반등… 원·달러도 1420원대로” (2026.8.3)
- 파이낸셜뉴스, “미일 ‘엔화 구하기’ 공식화…‘추가 공동개입도 주저하지 않을 것’” (2026.8.3)
- 헤럴드경제, “미·일 개입도 못막은 엔저…‘백방이 무효’” (2026.8.14)
- MBC뉴스, “미국, 이례적 외환시장 개입‥엔화약세 저지하려 대규모 매수” (2026.8.1)
- 뉴스비전e, “일본·미국, 15년 만에 합동 환율 개입…엔화 사상급 약세에 긴급 대응”
- 모인 해외송금 블로그, “[2026년 8월 1주차] 환율 하락 압력은 이어질까? 외환당국 개입 효과와 주요 변수”
- 나무위키, “2025-2026년 원화 고환율 사태”
- 나무위키, “일본 엔/연도별 흐름”
- 나무위키, “캐리트레이드”
- 헤럴드경제, “엔화 숏 2조엔 돌파…2024년 캐리 청산 악몽 재연되나 [Deep Spot]” (2026.8.9)
- 이비엔뉴스센터, “엔화 강세에 커지는 ‘엔캐리 청산’ 경계…국내 증시 변동성 촉각” (2026.8.22)
- 시사월드,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 위험 커져…미·일 외환시장 개입에 금융시장 모니터링 필요” (2026.8.22)
- KCIF 국제금융센터,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 가능성 분석”
- KDI 경제정보센터, “연준 FIMA 레포 제도 상설화의 영향과 시사점”
- KB의 생각, “[글로벌차트] 베선트가 띄우고 일본이 호응한 연준 FIMA, 여전히 ‘제로’” (2026.8.7)
-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Foreign and International Monetary Authorities (FIMA) Repo Facility” (federalreserve.gov)
- 서울신문, “국민연금 환헤지 비율 15%로 상향… 환율 방어 총력전” (2026.4.15)
- 인베스트조선, “외환 방파제 된 국민연금, 환헤지 넘어 달러 조달까지”
- 아세안익스프레스, “[아세안익스프레스] 한국은행-국민연금, 전략적 환헤지 1년 연장” (2025.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