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경제학 글을 몇 편 쓰고 나서 든 생각이 있다.
개념 하나하나는 다들 어디선가 들어본 것들이다. 전망이론, 심리계좌, 넛지, 사후확신 편향. 문제는 이것들이 각각 따로 소개되다 보니, 실제로 내가 뭔가를 잘못 판단했을 때 그중 어떤 개념을 꺼내 써야 하는지가 잘 안 잡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개념을 나열하는 대신 순서를 붙여보려 한다. 판단이 만들어지는 단계를 따라가면, 각 개념이 어느 지점에서 작동하는지가 보인다.
1단계: 기준점이 먼저 정해진다
모든 판단의 출발점은 절대적인 값이 아니라 기준점이다.
같은 100만 원이라도 500만 원에서 내려온 100만 원과 50만 원에서 올라간 100만 원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전망이론의 핵심은 사람이 이익과 손실을 기준점으로부터의 변화로 인식한다는 것이고, 손실 쪽 기울기가 이익 쪽보다 가파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기준점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설정되는 것이고, 대개 나 아닌 누군가가 설정한다. 정가를 먼저 보여주고 할인가를 붙이는 모든 판매 방식이 이 원리 위에 서 있다.
2단계: 돈에 이름표가 붙는다
기준점이 정해지면, 그다음은 분류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돈은 대체 가능하다. 보너스 100만 원과 월급 100만 원은 같은 돈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보너스가 훨씬 쉽게 사라진다. 머릿속에서 “공돈 계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게 심리계좌다. 같은 금액이라도 어떤 이름표가 붙느냐에 따라 쓰는 속도와 방식이 달라진다. 재밌는 건 이 계좌가 비합리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예산을 칸막이로 나누는 건 자기통제 수단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칸막이를 내가 정했는지, 아니면 누가 정해준 이름표를 그대로 받았는지다.
3단계: 선택지의 개수가 결과를 바꾼다
기준점과 계좌가 정해진 뒤엔 선택지가 온다.
잼 실험이 유명하다. 시식 코너에 잼을 24종 놓았을 때 발길은 더 많이 멈췄지만, 실제 구매는 6종만 놓았을 때가 훨씬 많았다. 선택지가 늘어나면 자유가 늘어난다는 전제가 여기서 깨진다.
합리적 선택 이론은 “선택지가 많을수록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는 선택지가 일정 수를 넘으면 비교 비용이 효용을 잡아먹고, 결국 선택을 미루거나 포기하게 된다.
4단계: 그 모든 걸 설계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까지 오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이 있다. 기준점을 정하고, 이름표를 붙이고, 선택지의 개수를 조절하는 건 누구인가.
넛지의 원래 취지는 선택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선택을 유도하는 설계였다. 장기기증 기본값, 연금 자동가입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같은 기법이 방향만 뒤집으면 다크패턴이 된다. 구독 해지 버튼을 3단계 안쪽에 숨기는 것도, 기술적으로는 똑같은 넛지다.
기본값의 힘이 얼마나 센지는 저축 영역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의지를 바꾸는 것보다 기본 설정을 바꾸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게 반복해서 확인된다.
사후: 왜 우리는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네 단계를 거쳐 판단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작동한다. 기억의 편집이다.
일이 벌어진 뒤에 보면 모든 게 필연처럼 보인다. “그럴 줄 알았어"라는 감각이 바로 사후확신 편향인데, 이게 위험한 이유는 당시 내가 실제로 어떤 정보를 갖고 있었는지를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판단 과정을 복기할 재료가 사라지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남과 비교하며 자기 위치를 재는 습관도 기준점 문제의 한 형태다. 비교 대상이 곧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니라 시장 단위로 올라가면
지금까지는 한 사람의 판단 이야기였다. 그런데 같은 편향이 수천만 명에게 동시에 작동하면 시장 구조 자체가 바뀐다.
패시브 투자가 그 사례다. “시장을 이기려 하지 말고 시장을 사라"는 합리적인 조언이 모두의 기본값이 되자, 정작 가격을 발견하는 주체가 줄어드는 역설이 생겼다. 개인 차원의 최적해가 집단 차원에서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얘기다.
정리하면
기준점이 정해지고 → 돈에 이름표가 붙고 → 선택지의 개수가 조절되고 → 그 전부를 누군가 설계하고 → 끝난 뒤엔 기억이 편집된다.
행동경제학을 공부해도 편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 순서를 알고 있으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어느 단계를 의심해야 하는지는 좁힐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정도가 현실적인 효용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행동경제학 관련 글을 더 쓰게 되면 이 글에 이어 붙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