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더 크지 않나, 라는 생각
중동 산유국이 파트너를 고른다면 당연히 중국 아닐까. 경제 규모도, 정치적 영향력도, 투자 여력도 비교가 안 될 텐데.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사우디 아람코가 한국 정유사에 조 단위 자본을 넣고, UAE가 위성·우주 기술을 한국과 함께 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 상식이 좀 흔들렸다. 왜 하필 한국일까. 체급으로 보면 일본도, 중국도 있는데.
답을 찾다 보니, 중동이 원하는 게 예전과 달라졌다는 사실부터 짚어야 했다.
산유국이 세금을 걷기 시작한 사정
2014년 11월, OPEC은 미국 셰일 업계를 고사시키려고 대대적인 증산과 저가 공세에 나섰다. 치킨게임이었다. 그런데 셰일 업계는 채굴 비용을 낮추는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결국 유가만 폭락해 산유국들의 재정이 구멍 났다. 석유 판매 대금 하나에만 의존하던 국가 운영 모델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이때 절감했다는 분석이 많다.
그래서 중동 왕정들이 매달린 게 ‘산업 다각화(Industrial Diversification)‘다. 제조업과 방산, 인프라를 유치해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법인세·소득세를 걷는, 이른바 ‘정상 국가’로의 전환이다. 여기에 UAE를 비롯한 선도 산유국들은 2050년쯤 석유 시대가 사실상 끝난다고 보고, 지하 자원이 무가치해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팔아 미래 산업 육성 자금으로 돌리려는 속도전에 들어갔다. OPEC 쿼터를 거부하고 탈퇴까지 불사하는 나라가 나온 배경이 이거다.
문제는 ‘산업을 유치한다’는 게 단순히 완제품을 사 오는 걸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기술을 자국에 심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일본이 걸려 넘어졌다.
일본이 거절했던 자리
UAE가 독자 인공위성 개발을 추진하던 시기, 일본은 기술 유출을 우려해 기술 이전을 아예 거부했다. 반면 한국은 현지 인력을 교육하고 핵심 기술을 실제로 넘겼다. 그 결과 UAE는 한국 기술을 기반으로 30%의 자국 독자 기술을 쌓아, NASA와 협력해 화성 탐사선을 쏘아 올리는 데까지 갔다. 이 사건 하나가 중동 전역에 ‘한국은 진짜로 기술을 나눠주는 파트너’라는 인식을 심었다는 얘기를,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솔직히 이 부분을 읽으면서 좀 의외였다. 기술 유출 우려는 어느 나라든 있을 법한데, 그 판단이 갈린 지점에서 이후 수십 년의 파트너십 구도가 결정됐다는 게. 단발성 계약 하나가 아니라 신뢰라는 자산이 쌓인 셈이니까.
중국은 왜 부담스러운 상대가 되는가
그렇다면 중국은 왜 밀릴까. 경제·정치적 체급이 지나치게 커서, 중동 입장에서는 대등한 파트너십보다 종속에 가까운 관계가 될 우려가 있다는 게 이유로 꼽힌다. 반면 한국은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제조업 역량을 갖췄으면서도 지정학적 패권 야욕이 없는 나라로 여겨진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급이, 오히려 신뢰를 얻는 조건이 된 셈이다.
여기에 비즈니스 방식의 차이도 자주 언급된다. 일본은 매뉴얼과 절차를 철저히 따지는 편이라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중동 비즈니스 기질과는 결이 잘 안 맞는다는 평가가 있다. 반면 한국은 상황에 맞춰 빠르게 움직이는 유연함이 있고, 가족을 중시하고 관계 거리가 가까운 문화적 정서가 중동 쪽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관찰과 경험에서 나온 일반화라서, 개별 기업이나 프로젝트마다 편차는 분명 있을 것이다.
인샬라, 부크라, 말리쉬
중동 비즈니스를 해본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세 단어가 있다. 인샬라(신의 뜻대로), 부크라(내일), 말리쉬(괜찮아, 실수 용인). 일정이 예고 없이 밀리고, 계획이 수시로 바뀌는 문화적 관행을 흔히 이렇게 부른다. 앞 글자를 따 ‘IBM 비즈니스 문화’라고도 한다는데, 이 예측 불가능성을 인내심과 유연성으로 버텨온 게 한국 기업들이 단순 거래를 넘어 다자간 장기 협력 생태계까지 만든 배경으로 꼽힌다.
그리고 이 신뢰가 실제 돈으로 확인된 사례가 있다. 세계 최대 석유기업 사우디 아람코가 한국 S-Oil에 9조 원 규모를 투자하고 최대주주 지분까지 확보한 것이다. 원유를 팔 곳을 찾는 수준이 아니라, 한국의 정제 기술력과 비축 인프라 자체를 아시아·글로벌 시장의 전략 기지로 인정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막에서 시작된 반세기 전 신뢰
이 신뢰가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다. 1970~80년대, 오일머니로 인프라 붐이 일던 중동 건설 현장에 대거 파견된 게 한국 노동자와 기술자들이었다. 도로, 항만, 플랜트를 지으며 ‘한국 사람은 일정을 맞춘다’는 평판이 쌓였고, 이게 이후 원자력·정유·방산 같은 고부가가치 협력으로 넘어가는 발판이 됐다. 실제로 UAE 바라카 원전을 한국전력이 수주해 짓고 운영까지 참여한 사례나, 국산 무기체계가 중동 방산 시장에서 계약을 따내는 흐름도 이 연장선에서 읽힌다. 원유-노동력 교환이라는 초기 관계가, 세대를 넘기면서 기술-신뢰 교환으로 성격이 바뀐 셈이다.
사우디의 ‘비전 2030(Vision 2030)’ 같은 국가 전략도 같은 맥락에 있다.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 관광, 엔터테인먼트, 첨단 제조업까지 산업 지형을 넓히겠다는 청사진인데, 이런 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 중동 정부들이 반복해서 찾는 파트너 목록에 한국 기업들이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 번의 대형 계약이 아니라, 여러 프로젝트에 걸쳐 반복적으로 선택된다는 게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문화가 잘 맞는다’는 말을 너무 믿어도 될까
여기서 잠깐 짚고 싶은 게 있다. 앞서 언급한 ‘한국인과 중동인의 정서가 잘 맞는다’는 식의 설명은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검증하기 까다로운 주장이기도 하다. 문화적 궁합이라는 건 계량화하기 어렵고, 성공한 사례를 뒤늦게 짜맞춰 설명하는 사후 서사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협력이 굳건해진 배경에는 문화적 친화력보다 기술 이전 약속을 실제로 지켰는지, 계약 조건을 얼마나 유연하게 조정해줬는지 같은 훨씬 구체적이고 계약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을 수 있다. 문화 궁합론은 결과를 설명하는 매력적인 스토리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원인이라고 단정하기엔 근거가 얇다는 점은 밝혀두고 싶다.
중동도 하나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중동’이라고 하나로 묶어 말했지만, 나라마다 다각화 전략의 결도 다르다는 점도 짚어야 공평할 것 같다. UAE는 관광·금융·항공 허브로 이미 상당히 앞서갔고, 사우디는 비전 2030을 앞세워 뒤늦게 속도를 내는 중이며, 카타르는 LNG 수출 기반 위에 스포츠·문화 산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한국이 이 나라들과 맺는 협력의 성격도 조금씩 다르다. UAE와는 우주·원전 같은 첨단기술 협력이 두드러지고, 사우디와는 정유·석유화학 자본 제휴가 중심이다. ‘중동이 한국을 선택했다’는 큰 그림은 맞지만, 실제로는 나라별로 각기 다른 이유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국을 찾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세 나라를 나란히 놓아보면
| 구분 | 일본 | 중국 | 한국 |
|—|—|—|—|
| 기술 이전 태도 | 유출 우려로 소극적 (UAE 위성 사업 거절 사례) | 협력하되 종속 우려 동반 | 현지 인력 교육 등 적극적 이전 |
| 체급 부담 | 상대적으로 낮음 | 크고 거대해 대등한 관계 형성 부담 | 기술력은 최상위, 패권 야욕 없음 |
| 비즈니스 방식 | 매뉴얼·절차 중심 | 국가 주도형 대규모 프로젝트 | 상황 대응이 빠르고 유연함 |
| 대표 협력 사례 | 비상 공급 협정 수준 | 인프라·건설 프로젝트 다수 | UAE 위성·화성탐사선, 아람코의 S-Oil 투자 |
표로 정리하니 오히려 선명해진다. 각국이 가진 강점이 다른 게 아니라, 중동이 지금 원하는 조건에 누가 더 맞아떨어지느냐의 문제였다.
이 신뢰, 계속 갈까
여기까지 보면 한국이 중동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 이유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다만 이게 영구적으로 보장된 지위인지는 다른 문제다. 중국도 산업 다각화 파트너로 계속 접근을 시도하고 있고, 일본 역시 뒤늦게 기술 이전 방침을 바꿀 가능성이 없지 않다. 지금의 우위가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될지는, 솔직히 나도 확신을 갖고 말하긴 어렵다. 다음 국면에서 어떤 나라가 어떤 카드를 꺼내느냐에 달린 문제로 남겨두는 게 맞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는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지금까지의 협력이 원유 거래나 건설 수주 같은 개별 프로젝트 단위였다면, 앞으로는 에너지 전환이라는 훨씬 긴 호흡의 어젠다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을 얼마나 투자했는지보다, 어느 나라가 다음 산업 전환의 파트너로 남을 것인지가 관건이 될 것 같은데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진행 중인 이야기다.
참고자료
- 서강대학교 유로메나연구소 박현도 교수 중동 정세 분석
- S-Oil 최대주주 지분 및 사우디 아람코 투자 공시자료
- UAE 우주청 화성 탐사선 '아말(Amal)' 프로젝트 자료
- OPEC 2014~2016년 증산 정책 및 유가 대응 기록
- UAE 정부 '2050 에너지 전략' 관련 발표자료
- 산업통상자원부 한-중동 경제협력 현황 보고서
- 한국수출입은행 중동 지역 투자 동향 자료
-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중동 비즈니스 가이드
- 사우디 비전 2030(Saudi Vision 2030) 정책 문서
- 한국석유공사 산유국 협력사업 현황
- 국제에너지기구(IEA) 중동 산업다각화 관련 보고서
- 한국무역협회 대중동 수출입 통계
- SK이노베이션·GS칼텍스 중동 협력사업 자료
- 외교부 중동아프리카국 경제협력 브리핑
- 걸프협력회의(GCC) 경제 통합 관련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