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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국가를 만든다 — 헌법에 없는 권력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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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도 “은행"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화폐를 찍고 세금을 걷고 군대를 조직할 권한은 또박또박 적혀 있는데, 은행을 세울 권한만큼은 그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791년 2월 25일, 워싱턴은 국립은행 설립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권한으로 세운 기관이 그렇게 미국에서 가장 큰 금융기관이자 가장 큰 법인이 됐습니다.

법에 없는 일을 정부가 해도 되는가. 이 질문은 236년 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새로운 위기가 터질 때마다 정부가 법전에 명시되지 않은 대응을 내놓는 걸 지켜봅니다. 팬데믹 지원금이든 긴급 규제든, “이런 권한이 어디 적혀 있느냐"는 질문과 “적혀 있지 않다고 못 할 이유는 없다"는 반론은 매번 반복됩니다. 그 싸움의 원형이 1791년 필라델피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형에는 흔히 생략되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은행이 문을 연 지 채 1년도 안 돼, 미국은 첫 번째 금융공황을 맞았습니다.

A weathered original US Constitution parchment page under glass
A weathered original US Constitution parchment page under glass

설계도에 없는 증축

건물을 설계할 때 도면에는 모든 벽을 다 그리지 않습니다. 내력벽, 즉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핵심 구조만 명시하고 나머지는 그 구조 안에서 합리적으로 채워 넣도록 남겨둡니다. 훗날 구조기술사가 증축을 검토할 때 묻는 건 “이 벽이 도면에 그려져 있는가"가 아니라 “이 증축이 원래 설계의 하중 논리와 충돌하는가"입니다. 도면에 없다고 무조건 불법 증축은 아닙니다.

매디슨과 제퍼슨은 헌법을 첫 번째 방식으로 읽었습니다. 도면에 그려진 것만 진짜 권한이고, 그려지지 않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언주의였습니다. 은행은 도면에 없으니 세울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제퍼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만약 의회가 “필요하고 적절하다"는 이유만으로 명시되지 않은 권한까지 쓸 수 있다면, 그 논리로는 못 할 일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은행이지만 내일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경고였습니다.

해밀턴의 반론은 두 번째 방식이었습니다. 헌법은 세금을 걷고 화폐를 관리하고 상거래를 규제할 권한을 연방정부에 명시적으로 줬습니다. 은행은 그 권한들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니, 헌법 조문에 적힌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하고 적절한” 수단이라면 명시되지 않았어도 정부가 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걸 훗날 ‘묵시적 권한’이라 불리게 될 논리로 풀어냈습니다. 목적이 헌법적이라면, 그 목적에 합리적으로 연결된 수단까지 함께 헌법의 보호 안에 들어온다는 뜻이었습니다.

같은 문서를 두고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나라를 읽어낸 셈입니다. 한쪽은 문서에 적힌 것만이 나라이고, 다른 쪽은 문서가 가리키는 방향까지가 나라였습니다.

워싱턴의 책상 위, 두 개의 의견서

1791년 2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뒤에도 워싱턴은 바로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료들에게 서면 의견서를 요청했습니다. 제퍼슨은 헌법 위반이라는 의견서를, 해밀턴은 합헌이라는 의견서를 각각 써서 올렸습니다. 워싱턴의 책상 위에는 며칠 동안 정반대 결론을 내린 두 장의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서명 마감이 다가오는데도 그는 결정을 미뤘습니다.

결국 워싱턴은 해밀턴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상업국가로서 신용과 자본을 조직해야 살아남는다는 해밀턴의 비전이,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공화국을 지키려는 제퍼슨의 비전을 눌렀습니다. 이 선택 하나로 미국은 이후 200년간 반복될 질문의 답을 처음으로 정해버립니다. 헌법에 없는 일이라도, 헌법의 목적에 부합한다면 정부는 할 수 있다는 답이었습니다.

법안이 통과되자 시장의 반응은 논쟁과는 정반대로 뜨거웠습니다. 그해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은행 주식 공모가 열렸습니다. 주당 400달러짜리 주식 2만 주, 총 800만 달러어치가 창구를 연 지 단 두 시간 만에 전부 팔렸습니다. 신청이 몰려 정작 배정받지 못한 물량만 4천 주어치 더 있었습니다. 당시 연방정부의 연간 세입이 440만 달러 수준이었으니, 이 은행 하나의 자본금 1,000만 달러는 정부 1년 살림의 두 배가 넘는 돈이 단 하루의 열기 속에 조직된 사건이었습니다. 워싱턴은 이 완판 소식을 두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이 정도로 빠르게 채워진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고 서신에 적었습니다.

A crowded Philadelphia street scene in July 1791
A crowded Philadelphia street scene in July 1791

법 조문을 두고 벌어진 논쟁과 시장이 보인 반응 사이의 간극이 이 사건의 진짜 얼굴입니다. 정치인들은 몇 달째 헌법 해석을 놓고 다퉜지만, 자본은 법안이 통과된 지 다섯 달 만에 정부 세입의 두 배를 두 시간 안에 쏟아부었습니다. 시장은 법리보다 빨리, 그리고 더 확실하게 답을 냈습니다.

2주 만에 무너진 신뢰

그런데 이 열기에는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주식이 완판되자 은행 청약권, 이른바 ‘스크립’은 곧바로 웃돈이 붙어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7월 초 25달러였던 스크립 가격은 열흘 남짓 만에 45달러로 뛰었고, 8월 초에는 135달러까지 치솟았습니다. 해밀턴 자신의 서신에는 한때 280달러까지 거래됐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신용이라는 무형자산이 만들어지자마자, 그 신용을 담보로 한 투기가 함께 자라난 셈입니다.

이 투기의 한복판에 윌리엄 듀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재무부 차관보 출신으로, 해밀턴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퇴임 후 듀어는 정부 채권과 은행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여 시세를 장악하려 했고, 이를 위해 막대한 돈을 빌렸습니다. 1792년 3월 5일, 그가 매집한 6% 국채 가격은 129까지 오르며 정점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자금 출처가 드러나고 은행들이 신용을 조이기 시작하자, 계획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사흘 만에 국채 가격이 116까지 떨어졌고, 3월 9일 듀어는 약 50만 달러의 빚을 갚지 못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혔고, 성난 군중이 감옥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뉴욕의 상거래는 한동안 사실상 멈췄고, 펜실베이니아 전역의 땅값은 3분의 1 수준으로 주저앉았습니다.

해밀턴은 이번에도 움직였습니다. 아직 뉴욕에 지점이 없었던 제1합중국은행 대신, 그는 뉴욕은행에 최대 100만 달러까지 국채를 사들이도록 지시했습니다. 담보가 확실한 곳에는 자금을 계속 공급하고, 가격이 폭락한 채권을 정부가 직접 사들여 시장에 바닥을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훗날 경제학자들은 이 대응이 영국의 월터 배젓이 80년 뒤에야 문서로 정리하게 될 “최종 대부자” 원칙, 즉 위기 때는 좋은 담보를 잡고 넉넉하게, 다만 페널티 금리로 유동성을 공급해야 한다는 원칙을 미리 실행한 사례라고 평가합니다. 공황은 몇 주 만에 가라앉았고, 미국 경제 전체로 번지는 충격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은행이 아니라 국가의 크기를 정한 싸움

이 두 장면, 두 시간 만의 완판과 2주 만의 붕괴를 나란히 놓으면 이 논쟁의 진짜 무게가 보입니다. 은행 하나를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는 표면의 질문이었습니다. 진짜 질문은 연방정부가 앞으로 얼마나 커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정부가 자신이 만든 시장의 부작용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였습니다.

해밀턴에게 미국의 미래는 제조업과 상업, 국제 자본이 오가는 나라였고, 그러려면 신용을 조직하고 화폐를 관리할 강한 중앙 기구가 필수였습니다. 제퍼슨에게 미국의 미래는 자영농이 자기 땅을 일구는 나라였고, 그런 나라에는 애초에 중앙은행이 할 일이 많지 않아야 했습니다. 헌법 해석 논쟁은 이 두 나라 중 어느 쪽이 진짜 미국이 될지를 가리는 대리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듀어의 파산은 제퍼슨 쪽에 실제 정치적 힘을 실어줬습니다. 1792년 하원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듀어와 얽힌 투기 스캔들에 등을 돌렸고, 그 반감은 해밀턴의 정적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신용을 만든 것도 해밀턴이었지만, 그 신용이 낳은 첫 사고를 정치적으로 감당한 것도 해밀턴이었습니다.

이 은행은 20년짜리 한시적 인가를 받았을 뿐, 헌법에 영구히 새겨진 기구는 아니었습니다. 1811년 인가가 만료되자 의회는 재승인을 부결시켰고, 은행은 문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화폐와 신용을 중앙에서 관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2합중국은행이 다시 세워졌고, 그마저 무너진 뒤에는 남북전쟁과 대공황을 거치며 결국 오늘날의 연방준비제도로 이어졌습니다. 매번 같은 질문이 다른 얼굴로 돌아왔고, 매번 그 답에는 위기 때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도 되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이 따라붙었습니다.

지금 연준이 금리를 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혹은 2008년과 2020년처럼 중앙은행이 무너지는 시장에 직접 유동성을 투입할 때마다, 우리는 사실 1791년 워싱턴의 책상 위에 놓였던 그 두 장의 의견서와, 1792년 3월 뉴욕은행 창구에서 해밀턴이 내렸던 그 지시를 다시 읽고 있는 셈입니다. 문서에 적힌 것만이 국가인가, 아니면 문서가 가리키는 방향까지가 국가인가. 그리고 그 국가는 자신이 만든 신용이 폭주할 때 다시 나서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는 아직도 하나의 정답이 없습니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 미합중국 제1 은행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D%95%A9%EC%A4%91%EA%B5%AD_%EC%A0%9C1_%EC%9D%80%ED%96%89
  2. Federal Reserve History, The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 https://www.federalreservehistory.org/essays/first-bank-of-the-us
  3. Federal Reserve Bank of Minneapolis, The Bank that Hamilton Built https://www.minneapolisfed.org/article/2007/the-bank-that-hamilton-built
  4. US House of Representatives, The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 https://history.house.gov/Historical-Highlights/1700s/1791_First_Bank/
  5. Wikipedia, Panic of 1792 https://en.wikipedia.org/wiki/Panic_of_1792
  6. Investor Amnesia, Panic Series (Pt. I) - 1792 https://investoramnesia.com/2021/09/05/the-panic-series-pt-i-1792/
  7. The Tontine Coffee-House, Hamilton and the Panic of 1792 https://tontinecoffeehouse.com/2021/02/01/hamilton-and-the-panic-of-1792/
#first-bank-of-the-united-states#implied-powers-doctrine#necessary-and-proper-clause#hamilton-jefferson-debate#panic-of-1792#william-duer-speculation#lender-of-last-resort#strict-constructionism#us-central-bank-history#commercial-vs-agrarian-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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