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0년 1월, 새로 태어난 미국이라는 나라는 이미 파산 직전이었습니다. 대륙회의가 전쟁 중에 찍어낸 지폐는 가치가 폭락해 사실상 휴지가 됐고, 병사들에게 급여 대신 나눠준 차용증서는 시중에서 액면가의 몇 분의 일로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의회에 낸 첫 보고서의 결론은 이상했습니다. 빚을 줄이자는 게 아니라, 각 주가 진 전쟁 빚까지 연방정부가 통째로 떠안아 오히려 부채를 키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잘 관리된 국가부채는 축복이다. 그는 그렇게 썼습니다.
빚이 늘어나는데 그게 왜 축복인지, 당시 의원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퍼슨과 매디슨에게 빚은 죄악이었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진 빚은 갚아서 없애야 할 대상이지, 끌어안고 관리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식과 해밀턴의 제안 사이의 틈, 거기서 미국 금융시스템의 첫 페이지가 시작됩니다.
당신이 지금 신용카드를 긁거나 대출 이자를 계산할 때 전제하는 것, 즉 “빚에도 등급이 있고, 잘 진 빚은 자산이 된다"는 감각 자체가 이때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국가신용등급 뉴스를 볼 때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그 개념이, 236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발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발상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누군가는 그 대가를 먼저 치러야 했습니다.
갚지 않아도 되는 빚이 있다
게임이론에는 반복게임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 번 보고 헤어질 상대에게는 굳이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지만,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오늘 약속을 어기면 내일부터 아무도 나와 거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복게임 안에서는 평판, 즉 “이 사람은 약속을 지킨다"는 믿음 자체가 실질적인 자산이 됩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지보다, 갚을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입니다.
해밀턴이 설계한 것도 정확히 이 구조였습니다. 그는 전쟁 채권을 들고 있던 사람들에게 액면가 전액을 갚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헐값에 채권을 팔아넘긴 옛 주인이 아니라, 그걸 되사들인 투기꾼에게 전액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매디슨은 이 방식에 정면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는 원래 증서를 받았던 병사와 농민에게는 액면가를, 나중에 헐값에 사들인 투기꾼에게는 실제 매입가만 지급하자는 ‘차등 지급안’을 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훨씬 공평해 보이는 안이었지만 의회에서 부결됐습니다.
해밀턴의 계산은 달랐습니다. 지금 누가 채권을 들고 있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종이가 정말로 돈이 될지 아닐지, 그 믿음을 만드는 게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부가 “누구에게 갚을지"를 사정에 따라 바꿀 수 있는 나라라면, 어떤 채권자도 그 종이를 진짜 자산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빚을 갚아 없애는 게 아니라, 빚을 계속 지고 이자를 꼬박꼬박 내는 나라라는 평판을 쌓는 것. 그것이 해밀턴이 말한 “축복"의 실체였습니다. 한 번 갚고 끝나는 개인의 빚과, 계속 굴러가며 신용을 증명하는 국가의 빚은 애초에 다른 게임이었던 셈입니다.
3만 달러 차이로 갈린 표결, 그리고 저녁식사
숫자로 내려가면 이 도박의 크기가 보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가 지고 있던 빚은 연방 부채와 각 주의 전쟁 부채를 합쳐 약 7,900만 달러 규모로 추정됩니다. 그해 연방정부의 연간 세입은 400만 달러 남짓이었습니다. 오늘로 치면 연 소득의 스무 배 가까운 빚을 새로 떠안겠다고 선언한 셈입니다.
의회는 이 안을 두고 여름 내내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표결은 근소한 차이로 부결됐습니다. 버지니아처럼 이미 빚을 갚아버린 남부 주들은 왜 자신들의 세금으로 매사추세츠 같은 북부 주의 빚까지 갚아줘야 하느냐고 반발했습니다. 매디슨은 해밀턴의 계산대로라면 버지니아가 새로 부담할 연방 세금이 500만 달러인데, 정작 연방정부가 인수해줄 버지니아의 빚은 300만 달러뿐이라고 따졌습니다.
교착이 풀린 건 1790년 6월 20일, 뉴욕에 있던 제퍼슨의 집 저녁식사 자리였습니다. 해밀턴과 제퍼슨, 매디슨 세 사람은 부채 인수안을 통과시키는 대가로 새 연방 수도를 남부 포토맥 강변에 짓기로 합의했습니다. 재정 정책과 수도 위치라는, 언뜻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두 문제가 그 식탁 위에서 하나로 묶였습니다. 두 달 뒤인 8월, 자금조달법이 통과되면서 각 주의 빚 약 2,150만 달러가 연방정부 앞으로 넘어갔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건 협상의 기술이 아닙니다. 국가라는 것이 헌법 문서 한 장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빚을 갚겠다는 약속을 실제로 지키는 과정에서 서서히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1789년의 미국은 13개 주가 느슨하게 묶인 종이 위의 연합체에 가까웠습니다. 1790년 8월, 각 주의 채권자들이 개별 주가 아니라 연방정부를 채무자로 바라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미국은 하나의 재정 단위로 실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술과 세금 — 신용의 대가는 누가 냈나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더 던져야 합니다. 연방정부가 이 거대한 빚의 이자를 매년 갚으려면, 그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해밀턴은 관세와 함께 국내 소비세를 재원으로 잡았고, 그중 하나가 위스키를 비롯한 증류주에 매기는 소비세였습니다. 1791년 도입된 이 세금은 동부 도시의 채권자들에게 이자를 지급하기 위해, 서부 변경 지역의 농민들에게서 걷혔습니다.
이 구조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서부 같은 산간 변경 지역 농민들에게 곡물을 위스키로 증류하는 건 단순한 기호품 생산이 아니라 운송이 어려운 곡물을 상하지 않는 형태로 바꾸는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세금은 이런 소규모 증류업자에게 대형 증류소보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지웠습니다. 결국 1794년, 서부 농민들은 세금 징수관을 습격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위스키 반란입니다. 워싱턴은 직접 민병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습니다.
채권 시장에서 신용이 만들어지는 장면과, 변경의 농민이 세금 징수관에게 타르를 뒤집어씌우는 장면은 같은 정책의 앞면과 뒷면입니다. 도시의 채권자들이 액면가 전액을 돌려받으며 국가에 대한 신뢰를 쌓는 동안, 그 신뢰의 비용은 정치적 발언권이 적은 변경 농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국가신용이라는 발명품은 공짜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익을 보는 자리와 비용을 대는 자리가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믿음이 화폐가 되는 순간
부채 인수는 회계 처리가 아니었습니다. 13개의 독립적인 채무자를 하나의 채무자로 합치는 작업이었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건 하나의 신용, 하나의 시장, 하나의 국가였습니다. 각 주의 채권자들이 더는 자기 주 정부가 아니라 연방정부를 바라보게 됐을 때, 그들은 처음으로 “미국"이라는 단일한 실체와 거래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헌법이 정치적 통합을 선언했다면, 부채 인수는 그 통합을 채권자들의 장부 위에서 현실로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용은 곧바로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연방정부가 발행한 새 채권은 시장에서 사고팔리며 사실상 화폐처럼 유통됐고, 부족했던 유동성을 채우며 신생국의 상업을 움직이는 동력이 됐습니다. 종이 한 장에 불과했던 국가의 약속이, 실제로 거래되고 신뢰받는 자산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만 그 종이가 신뢰를 얻는 대가는 누군가 세금으로, 누군가는 무장봉기로 갚아야 했습니다.
236년 뒤에도 같은 질문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미국 국채를 사고, 어떤 나라는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통화 가치가 흔들립니다. 그 밑바닥에 깔린 질문은 1790년 그 저녁식사 자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가보다, 갚을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가. 국가든 개인이든, 신용이란 결국 다음에도 이 관계가 계속될 것이라는 상대의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위스키 반란은 또 다른 질문을 남겼습니다. 신용을 지키는 비용은 언제나 균등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재정 긴축이나 국채 상환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다른 말로 되풀이합니다. 누구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누구의 지갑이 먼저 열리는가. 해밀턴은 이 믿음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그 성공의 대가로 또 다른 싸움을 열어젖혔습니다. 빚을 갚을 능력을 만들려면 세금을 걷어야 했고, 세금을 걷으려면 그 돈을 관리할 기관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다음으로 의회에 내민 것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물건, 바로 국립은행이었습니다.
참고자료
- 위키백과, 1790년 자금 조달법 https://ko.wikipedia.org/wiki/1790%EB%85%84_%EC%9E%90%EA%B8%88_%EC%A1%B0%EB%8B%AC%EB%B2%95
- 위키백과, 공공 신용에 대한 첫 번째 보고서 https://ko.wikipedia.org/wiki/%EA%B3%B5%EA%B3%B5_%EC%8B%A0%EC%9A%A9%EC%97%90_%EB%8C%80%ED%95%9C_%EC%B2%AB_%EB%B2%88%EC%A7%B8_%EB%B3%B4%EA%B3%A0%EC%84%9C
- Wikipedia, Debt assumption https://en.wikipedia.org/wiki/Debt_assumption
- 위키백과, 해밀턴 경제 프로그램 https://ko.wikipedia.org/wiki/%ED%95%B4%EB%B0%80%ED%84%B4_%EA%B2%BD%EC%A0%9C_%ED%94%84%EB%A1%9C%EA%B7%B8%EB%9E%A8
- IMF F&D Magazine, The History of the U.S. Financial System https://www.imf.org/en/publications/fandd/issues/2018/03/gaspar
- US House of Representatives, The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 https://history.house.gov/Historical-Highlights/1700s/1791_First_Ba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