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고원 어딘가, 스페인 정복 이전의 키체족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사실 신들의 세 번째 시도라고 믿었다. 첫 번째 인간은 진흙으로 빚었지만 형체가 흐물흐물 무너졌다. 두 번째는 나무로 깎았다. 걷고 말은 했지만 감정이 없었고 창조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신들은 실망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물을 쏟아부어 나무 인간들을 지워버렸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창세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신이 실망해서 인간을 물로 쓸어버리는 구조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결이 다르다. 성경의 홍수는 죄악에 대한 심판이다. 마야의 홍수는 실패한 제작품에 대한 재작업이다. 신이 화가 난 게 아니라, 신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다는 이야기다.
나무로 만든 인간이 목격한 것
포폴 부에 따르면 나무 인간들의 결정적 결함은 창조자를 향한 기억과 감사가 없었다는 데 있다. 겉모습은 인간과 비슷했지만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신들은 이들을 없애기 위해 하늘에서 송진 같은 비를 내렸고, 심지어 인간이 부려먹던 도구들과 짐승들까지 들고일어나 나무 인간을 공격했다고 전해진다. 살아남은 극소수는 원숭이가 되어 숲으로 도망쳤다는 설명도 덧붙는다.
주목할 지점은 이 홍수의 강도다. 성경의 홍수는 “가장 높은 산보다 열다섯 자나 더 불어났다"고 묘사될 만큼 절대적인 재앙이다. 반면 마야의 홍수는 나무 인간이라는 특정 실패작을 지우는 정도의 규모로 그려진다. 세상 전체를 리셋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시제품을 폐기하고 다음 시제품 — 옥수수 반죽으로 빚은, 지금의 인간 — 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창조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세계관, 신조차 실패하고 다시 시도한다는 세계관이 이 홍수 이야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물고기가 된 부부, 개가 된 부부
아즈텍 신화는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다섯 개의 ‘태양의 시대’ 가운데 네 번째, 물의 시대를 다스리던 비의 신 틀랄록이 대홍수(혹은 불의 비)로 인간을 멸망시킨다. 이때 선하게 살던 부부 타타와 네나만이 살아남는데, 조건이 있었다. 신들이 정해준 대로 옥수수만 먹으라는 것. 부부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물고기를 잡아먹었고, 이를 알게 된 틀랄록은 분노해 둘을 개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네 번째 시대가 끝나고 다섯 번째, 지금의 태양 시대가 시작된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생존 자체가 완전한 구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살아남았지만 규칙을 어기고, 그 대가로 인간의 형상마저 잃는다. 서아시아 신화에서 생존자는 새 인류의 조상이자 축복받은 존재로 남는데, 아즈텍 신화의 생존자는 한 번 더 시험받고 결국 처벌받는다. 홍수 이후에도 이야기는 완결되지 않고, 다음 실패와 다음 시대로 계속 미끄러진다. 다섯 겹의 태양 시대라는 순환적 시간관 자체가 이런 서사 구조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세계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몇 번이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다는 관념.
북미 대평원의 홍수, 산꼭대기까지 차오른 물
북미 원주민 전승에서도 홍수는 낯설지 않은 소재다. 대평원의 샤이엔족은 미주리강 유역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홍수 전통을 갖고 있는데, 이 사건이 부족의 역사 자체를 바꿔놓았다고 전한다. 블랙피트족에는 늙은 신이 홍수 후 사람들을 산 위에 모아 서로 다른 색깔의 물을 마시게 했고, 그 결과로 부족마다 다른 언어를 쓰게 됐다는 ‘언어의 기원’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국 남서부의 호피족을 비롯한 여러 푸에블로족 사이에는 물이 산 정상 부근까지 차올랐다는 전승이 공통적으로 남아 있다.
이 지역 신화들의 공통점은 홍수가 인류 전체의 종말이 아니라, 특정 부족이나 언어 집단의 기원을 설명하는 장치로 쓰인다는 데 있다. 세계를 통째로 새로 쓰는 사건이라기보다, 지금 우리가 왜 이렇게 흩어져 다른 말을 쓰며 사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표로 놓고 보면 보이는 것
지금까지 1부와 2부, 3부에 걸쳐 살펴본 신화들을 한 자리에 모아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드러난다. 지역도 언어도 교류할 방법이 전혀 없었던 문명들이, 놀랍도록 비슷한 뼈대를 반복해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요소가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한다. 첫째, 세상을 정리하려는 결정을 내리는 초월적 존재. 둘째, 그 결정을 미리 알고 대비하는 소수의 인간. 셋째, 물이 빠진 뒤 세상이 다시 시작된다는 재건의 감각. 문화권마다 이 세 요소에 붙이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 심판이거나, 시험이거나, 시행착오이거나, 기원의 설명이거나. 하지만 뼈대 자체가 이렇게까지 겹친다는 사실은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다.
신화가 아니라 해수면이 진짜 증거일 수 있다
여기서 방향을 완전히 틀어야 할 지점이 온다. 20세기 후반 이후 일부 지질학자들은 이 전 세계적 유사성의 답을 신화학이 아니라 지구사에서 찾기 시작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1997년 지질학자 윌리엄 라이언과 월터 피트먼이 제기한 흑해 대홍수 가설이다. 이들은 약 7,600년 전, 지중해의 바닷물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당시 담수호였던 흑해로 파국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의 최대 수심은 각각 110미터, 103미터인데, 최후빙기 최성기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약 125미터나 낮았다. 즉 그 시절엔 이 해협조차 바닷물 위로 드러난 육지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빙하가 녹아 지중해 수위가 다시 올라오면서, 어느 시점엔가 이 좁은 문턱을 넘어 흑해 유역 전체가 순식간에 잠겼을 수 있다는 게 이 가설의 핵심이다.
이 가설은 발표 당시 큰 화제를 모았고, 흑해 연안에 살던 신석기 농경민들이 이 사건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며 근동 전역에 홍수의 기억을 퍼뜨렸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이어졌다. 다만 학계 안에서 이 가설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일부 연구자는 흑해가 그렇게 파국적으로 채워진 게 아니라 훨씬 점진적으로 차올랐다는 증거를 제시하며 반박한다. 흑해 대홍수와 노아의 홍수를 직접 연결 짓는 주장에 대해서도,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신중론이 나온다.
흑해 가설이 맞든 틀리든, 더 확실한 배경은 따로 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가던 약 1만 4천 년 전 무렵부터, 대륙을 덮고 있던 거대한 빙상이 녹아내리며 전 세계 해수면이 짧은 기간에 급격히 상승하는 사건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 시기 해안선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고,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그러나 때로는 인간이 몇 세대 안에 체감할 만큼 빠르게 물러났다. 약 8,200년 전에는 북반구 기후가 급격히 요동친 이른바 ‘8.2ka 이벤트’도 기록돼 있다 — 캐나다 북부의 거대한 빙하호가 갑자기 붕괴하며 막대한 담수가 바다로 쏟아져 들어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신화 속 홍수의 날짜를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류가 강 유역에 정착해 살던 바로 그 시기, 지구는 실제로 해수면이 여러 차례 사람의 생애 안에서 체감될 만큼 빠르게 오르내리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강 유역이라서, 그리고 정말 물이 차올랐기 때문에
그렇다면 전 세계 홍수 신화가 닮은 이유를 설명하는 두 가지 이론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문명이 대개 강 유역과 해안 저지대에서 시작됐고, 큰 강은 어디서든 주기적으로 범람하기 마련이므로 각 문명이 독자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리라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빙하기 말 실제로 벌어진 급격한 해수면 상승과 국지적 재앙(흑해 유입설, 8.2ka 이벤트 등)이 여러 세대에 걸쳐 구전되며 신화로 굳어졌으리라는 설명이다. 두 설명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실제 사건이 씨앗이 되고, 강 유역이라는 반복되는 생활 조건이 그 씨앗을 계속 자라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심리학적 설명 하나를 더 얹을 수도 있다. 물은 인류에게 생명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통제할 수 없는 죽음의 위협이기도 하다. 이 양가성 자체가 어느 문화권에서든 물을 신성한 심판이나 재창조의 상징으로 빚어내기 쉬운 재료였을 것이다. 실제 사건의 기억, 반복되는 지리적 조건, 그리고 물이라는 상징이 가진 보편적 양가성 — 이 세 가지가 겹쳐지면서, 서로 만난 적 없는 문명들이 놀랍도록 비슷한 이야기를 각자 써 내려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홍수 이야기
1부에서 우리는 조지 스미스가 니네베 점토판을 손에 쥐던 순간에서 출발했다. 2부에서는 같은 재난 앞에서 동양이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는 걸 봤다. 그리고 지금, 아메리카의 신화들과 지구사적 증거들을 나란히 놓고 나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전 세계 홍수 신화는 누가 누구를 베낀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 다른 문명이 비슷한 지리적 조건과, 어쩌면 비슷한 시기의 실제 재난을 겪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감당하기 위해 써 내려간 독립적인 기록에 가깝다.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대홍수’를 목격하는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해수면은 다시 오르고 있고, 저지대 도시들은 이미 방재 설비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수천 년 뒤 누군가 지금 이 시대의 기록을 발굴한다면,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누구의 자리에 서 있게 될까 — 물을 피해 배를 짓는 사람일까, 물길을 새로 내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저 물이 세상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인 사람일까.
참고자료
- 위키백과 - 대홍수 신화
- 위키백과 - Black Sea deluge hypothesis
- 나무위키 - 대홍수 신화
- 나무위키 - 포폴 부
- 나무위키 - 마야 신화
- 월간중앙 - 옥수수 반죽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인간
- 국민기자뉴스 - 지구 곳곳에 등장한 홍수신화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일까
- IPCC AR4 용어집 - 8200년 전 현상
- 곤우치수, 마누-마츠야, 우트나피쉬팀 관련 자료 (1부·2부 참고문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