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궁궐 문 앞으로 수만 명이 밀려든다.
집춘문과 월근문, 통화문과 홍화문. 문이 열리는 순간, 손에 말뚝과 대나무 등을 든 건장한 사내들이 서로를 밀치며 뛰어들어간다. 이들이 노리는 건 학문을 겨룰 자리가 아니라, 그저 남보다 먼저 명당을 차지하는 것이다.
1844년(헌종 10년),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쓴 장편 가사 『한양가(漢陽歌)』는 이 아수라장을 이렇게 담아 놓았다.
“집춘문(集春門) 월근문(月覲門)과 통화문(通化門) 홍화문(弘化門)에 / 부문(赴門)을 하는구나 건장(健壯)한 선접군(先接軍)이 / 자른 도포(道袍) 젖혀 매고 우산(雨傘)에 공석(空石) 쓰고 / 말뚝이며 말장이며 대로 만든 등(燈)을 들고 각색(各色) 글자 표(標)를 하여 등을 보고 찾아가네”
‘선접군’은 응시생이 아니다.
돈을 받고 미리 달려가 시험장의 목 좋은 자리를 맡아주는 고용된 자리잡이꾼이다. 등불에 적힌 글자는 저마다 소속된 ‘팀’을 가리키는 표식이었다.
조선 후기 과거시험은 왜 답안이 아니라 자리싸움으로 시작됐을까.
수만에서 십만 명이 한꺼번에 몰리면 채점관은 관행적으로 가장 먼저 제출된 답안지 수백 장만 훑어보고 합격자를 골랐다. 그러니 시관의 눈에 잘 띄는 자리를 차지하는 물리적인 힘이, 글재주보다 먼저 승부를 갈랐다.
우산과 휘장 아래, 부정행위는 어떻게 산업이 되었나
선접꾼이 피땀으로 지켜낸 자리에는 곧 잘 짜인 ‘본진’이 들어선다.
조선시대 부정행위라고 하면 옷소매에 답안을 숨기는 수준을 떠올리기 쉽지만, 『한양가』가 보여주는 풍경은 그보다 훨씬 조직적이다.
“현제판(懸題板) 밑 설포장(雪圃場)에 말뚝 박고 우산 치고 / 휘장(揮帳) 치고 등을 꽂고 수종꾼이 늘어서서 / 접(接)마다 지키면서 엄포(嚴褒)가 사나울사 / 각각 제 접을 찾아가서 책행담(冊行擔) 열어놓고 / 해제(解題)를 생각하여 풍우(風雨)같이 지어내니 / 글하는 거벽(巨擘)들은 구구(句句)이 읊어내고 / 글씨 쓰는 사수(寫手)들은 시각(時刻)을 못 머문다”
시제가 내걸리자 우산과 휘장 아래 ‘부정행위 기지’가 세워지고, 완벽한 분업이 돌아간다.
- 거벽(巨擘): 학식은 뛰어나나 벼슬길이 막힌 가난한 양반들. 돈을 받고 그 자리에서 명문 답안을 지어내는 ‘대리 작가’였다. 전설적 거벽 유광억은 의뢰인이 낸 돈의 액수에 맞춰 장원급, 합격권 답안을 ‘맞춤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 사수(寫手): 거벽이 지은 글을 시관의 눈을 사로잡을 명필로 옮겨 적는 ‘대리 필경사’였다.
- 선접꾼·수종꾼: 이 모든 과정이 방해받지 않도록 자리와 사람을 지키는 ‘경호 인력’이었다.
자리 확보(선접꾼) → 내용 창작(거벽) → 서체 완성(사수)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왜 하필 세 개의 직군으로 쪼개졌을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발각의 위험을 분산시키고, 각자 잘하는 일에만 집중해 성공률을 끌어올리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부정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부정입학 산업’이 조선 후기 과거장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을 처음 읽었을 때, 단순한 커닝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정교함에 적잖이 놀랐다.
법은 왜 부정행위를 막지 못했나
국가가 이 난장판을 손 놓고 지켜본 것은 아니다.
대리 시험에 대한 강력한 처벌 조항은 이미 세종 29년(1447)의 실록에서부터 나타난다. “남의 재주를 빌려 답안을 쓰거나 남을 대신해 써 주는 사람, 중간에서 통하게 하는 사람은 곤장 백 대와 징역 3년의 엄벌에 처하라"는 것이었고, 이 원칙은 이후 조선의 여러 법전에 계승되며 다듬어졌다.
| 죄목 | 설명 | 처벌 |
|---|---|---|
| 차술(借述)·대술(代述) | 거벽·사수를 고용한 대리 시험 | 곤장 100대, 강제노역 3년, 영구 응시 자격 박탈 |
| 협서(挾書) | 커닝 페이퍼를 반입 | 응시 자격 3년 정지 |
| 암표(暗標) | 시험관과 짜고 답안지에 몰래 표식 | 합격 취소, 시험관 유배 |
| 과장소란(科場騷亂) | 시험장 내 폭력 행위 | 현장 체포, 응시 자격 박탈 |
그러나 법의 칼날은 정작 부패한 현실 앞에서 자꾸 무뎌졌다.
숙종 25년(1699)에는 시험관이 감독관과 결탁해 답안지를 사후에 고쳐 쓴 사실이 발각되어, 합격자 15명 전원의 급제가 취소되고 관련 시험관들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른바 ‘기묘과옥’이다.
이런 사건이 반복되자 도성에는 “어사화(御賜花)냐, 금은화(金銀花)냐?“라는 동요가 울려 퍼졌다. 임금이 내리는 영예의 꽃 어사화가, 실은 돈으로 산 꽃이 아니냐는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부정행위가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국가는 시험 전체를 무효로 돌리는** ‘파방(罷榜)’**이라는 극약 처방까지 꺼내 들었다. 죄 없이 밤새 답안을 써 낸 응시생까지 함께 피해를 보는 조치였으니, 이는 통제력의 승리라기보다 한계의 자백에 가까웠다.
무너진 것은 능력주의만이 아니었다
『한양가』가 노래한 19세기 과거시험은 세도정치 아래 능력주의라는 기둥이 어떻게 서서히 내려앉았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관직이 돈과 연줄로 거래되는 판에서, 공정성을 지키려는 법전 속 조항들은 점점 공허한 문구로 굳어갔다.
새벽 궁궐 문 앞을 채웠던 선접군들의 몸싸움도, 우산 아래 숨죽여 붓을 놀리던 거벽과 사수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실력을 겨루는 관문이 이미 자리와 돈을 겨루는 관문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
『한양가』는 번화한 도읍의 찬가인 동시에, 그 안에서 조용히 썩어 가던 한 왕조의 만가(輓歌)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어사화는 더 이상 피어나지 못했고, 오직 금은화만이 욕망의 이름으로 만발했다.
조선 후기 시장 경제를 이끌었던 보부상들의 이야기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한다.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양가(漢陽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807
- 국립국악원 국악사전 - 한양가(漢陽歌): https://www.gugak.go.kr/ency/topic/view/2073
- 국가유산청 - 타락한 과거(科擧)의 사생아들, 선접꾼과 거벽·사수: https://www.khs.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26278&bbsId=BBSMSTR_1008
- 지역N문화 - 과거 시험 대리 응시 전문가, 거벽: https://ncms.nculture.org/unique-job/story/9885
- 국립한글박물관 - 서울 구경 가자스라, 한양가: https://www.hangeul.go.kr/webzine/202401/sub1_1.html
- 경향신문 - 김경수의 법률톡톡, 과거시험 부정행위는 곤장 100대: https://www.khan.co.kr/article/201810311559001